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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방에서

기술 채팅방에서 나가고 기획 카톡방에 들어간 날

기술 채팅방에서 나가고 기획 카톡방에 들어간 날

알림이 울리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출근 전에 폰을 봤다. 알림이 99+였던 기술 채팅방이 조용하다. 아니다. 채팅방은 시끄럽다. 내가 나간 거다. 지난주 금요일 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채팅방 나가기" 버튼. 3년 동안 매일 500개씩 알림이 쌓이던 그 방. Python 팁, FastAPI 업데이트, AWS 장애 공유, "GPT한테 물어봤더니" 시리즈. 매일 스크롤 올려가며 읽었다. 근데 요즘은 읽어도 안 읽어도 똑같더라. 나간 다음 날 아침. 폰이 가볍다. 알림 3개. 엄마, 아내, 쿠팡.그리고 새 채팅방 하나가 보인다. "PM 커리어 전환 모임". 어제 들어간 거다. 채팅방 목록이 말해준다 채팅방 목록을 위에서부터 봤다.PM 커리어 전환 모임 (new) 회사 전체 공지 개발팀 업무방 아내 부모님 대학 동기들 Python Korea (나감) Django 개발자 모임 (나감) 백엔드 주니어 멘토링 (나감)3개를 나갔다. 동시에. 대신 들어간 방.PM 커리어 전환 모임 프로덕트 오너 스터디 기획자 이직 정보방언제부터였을까. 채팅방 목록이 내 정체성을 대변한다는 걸 깨달은 게. 백엔드 개발자였던 사람의 채팅방 목록이 아니다. 이건.첫 메시지를 못 보냈다 PM 커리어 전환 모임. 들어가서 3일 동안 메시지를 못 보냈다. 99개 메시지가 쌓였다. 다들 자기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5년차 개발자입니다. AI 때문에 기획 전환 고민 중이에요." "반갑습니다. 개발 7년 했는데 코드 짜는 게 이제 의미 없어 보여서요." "저도 비슷합니다. GPT가 제 일을 다 하더라고요." 다 나랑 똑같다. 근데 메시지를 못 보내겠다. 키보드 앞에서 10분을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6년차 백엔드 개발자입니다. 최근에 PM 전환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작성. 지움. 작성. 지움. 왜 못 보내는 거지? 아. 이걸 보내는 순간, 나는 "PM 전환을 고민하는 개발자"가 된다. 온라인에서도. 공식적으로. 금요일 밤에 보냈다. 퇴근하고 소주 반 병 마시고. 개발팀 단톡방의 미묘함 월요일 오전. 회사 개발팀 단톡방. "한기획님 이거 API 스펙 확인 좀 부탁드려요." 예전 같으면 바로 답했다. "네 확인했습니다. 수정 반영할게요." 근데 이번엔 30분 뒤에 답했다. 지금 기획 문서 쓰고 있었거든. "아 네. 오후에 확인하고 공유드릴게요." 팀장이 물었다. "기획님 요즘 바쁘세요?" "네 조금요." 거짓말이다. 안 바쁘다. 근데 예전처럼 코드에만 매달리고 싶지 않다. 개발팀 단톡방 알림을 껐다. 1시간에 한 번씩 확인하기로 했다.예전에는 5분마다 봤다. 검색 기록이 달라졌다 구글 검색 기록을 봤다. 3개월 전:"FastAPI async performance" "AWS Lambda cold start 해결" "Python type hints 모범 사례" "Redis pub/sub vs Kafka"지금:"개발자 출신 PM 이직" "기획 경력 없이 PM 되는 법" "프로덕트 오너십이란" "PM 포트폴리오 작성법"유튜브 시청 기록도 마찬가지다. 3개월 전:"클린 아키텍처 설명" "도커 컴포즈 활용" "FastAPI 프로젝트 구조"지금:"PM이 하는 일" "개발자에서 기획자로" "사용자 인터뷰 방법론" "로드맵 작성 실전"브라우저 북마크도 정리했다. "개발 레퍼런스" 폴더를 접고, "PM 자료" 폴더를 펼쳤다. 이게 정체성의 변화구나. 링크드인 프로필 수정 지난주 목요일 밤. 링크드인 프로필을 고쳤다. 예전 소개: "Backend Developer | Python, Django, FastAPI | 6 years experience" 바꾼 소개: "Backend Developer transitioning to Product Management | 6 years in tech | Interested in user-centered product development" "transitioning to Product Management" 이 한 줄을 쓰는 데 1시간 걸렸다. 저장 버튼 누르기 전에 10번 다시 읽었다. 누르고 나니까 세상이 알았다. 내가 전환 중이라는 걸. 다음 날 알림 2개. PM 리크루터 2명이 프로필을 봤다. 근데 메시지는 없다. 당연하지. 기획 경력 0년인데. 노션 워크스페이스 이름 개인 노션 워크스페이스 이름을 바꿨다. 예전: "Dev Notes" 지금: "Product & Dev" 워크스페이스 안 페이지 구조도 바뀌었다. 예전: 📁 개발 공부 - Python - Django - AWS 📁 프로젝트 - API 개발 - 성능 최적화지금: 📁 PM 준비 - 기획 공부 노트 - PM 인터뷰 준비 - 포트폴리오 📁 개발 (접음) - Python - Django"개발" 폴더를 접었다.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6년이 들어있는데. 근데 더 이상 매일 펼치지 않는다. 채팅방 메시지 톤이 달라졌다 개발팀 단톡방에서 내 말투가 바뀌었다. 예전: "이 부분 비동기 처리하면 성능 10배 나아질 것 같은데요." "API 스펙 수정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려요." "로직 리뷰 완료했습니다." 지금: "이 기능 사용자 입장에서 필요할까요?" "이 플로우 기획 의도가 뭐였죠?" "사용자 시나리오 문서 있으면 공유 부탁드려요." 팀원들이 느낀다. 확실히. 팀장이 슬랙 DM 보냈다. "기획님 요즘 관점이 많이 바뀌신 것 같아요. 기획 쪽에 관심 있으세요?" "네. 조금요." "좋은 것 같아요. 개발자 출신 PM이 요즘 많이 필요하던데." 팀장도 안다. 내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사이드 프로젝트 노션 개인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혼자. 예전 같으면 바로 코드부터 짰다. FastAPI 프로젝트 생성. DB 스키마 설계. API 엔드포인트 작성. 이번엔 코드를 안 짰다. 2주 동안. 대신 노션에 이것만 썼다.타겟 사용자 정의 문제 정의 해결 방안 기능 우선순위 사용자 플로우 와이어프레임 (피그마로) 기술 스택 선정 이유 (맨 마지막)코드는 GPT한테 시킬 거다. 나는 기획만. 이게 PM이 하는 일이구나. 금요일 저녁의 다른 기분 금요일 저녁 7시. 퇴근. 예전에는 "이번 주도 코드 쳤다" 기분. 이번 주는 "사용자 시나리오 3개 작성했다" 기분. 둘 다 일을 했는데 기분이 다르다. 코드 칠 때는 GPT가 나보다 10배 빠르다는 생각. 내가 왜 하지? 기획 쓸 때는 "이건 나만 할 수 있다" 기분. GPT는 내 의도를 모른다. 주말에 PM 인강을 들었다. "사용자 인터뷰 방법론". 예전에는 "클린 코드" 인강 들었다. 지금은 재밌다. 예전보다. 아내와의 대화 일요일 저녁. 아내가 물었다. "요즘 되게 달라진 것 같아." "뭐가?" "말하는 것도. 폰 보는 것도. 일 얘기할 때 눈빛도." "그래?" "응. 예전엔 '오늘 코드 이거 짰어' 이런 얘기만 했잖아. 요즘은 '사용자가 이럴 것 같아' 이런 얘기 하더라." 맞다. 나도 느낀다. "바뀌고 있는 것 같아. 조금씩." "좋은 쪽으로?" "모르겠어. 근데 예전보다는 재밌어." "그럼 됐다." 아내도 안다. 내가 전환 중이라는 걸. 채팅방 목록부터. 검색 기록부터. 말투부터. 정체성은 작은 것들의 합 개발자 채팅방 3개를 나갔다. PM 채팅방 3개에 들어갔다. 링크드인 소개를 바꿨다. 노션 워크스페이스 이름을 바꿨다. 구글 검색어가 달라졌다. 말투가 달라졌다. 이게 정체성의 변화다. 어느 날 갑자기 "나 이제 PM이야" 선언하는 게 아니다. 작은 것들이 하나씩 바뀐다. 매일. 조금씩. 그리고 어느 순간 돌아보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6개월 전 내 채팅방 목록과 지금 내 채팅방 목록은 다르다. 그게 전부다.온라인 정체성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채팅방 목록이 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