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했을 때의 감정

아내가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했을 때의 감정

그날 밤 아내가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고마웠다. 진심으로. 근데 동시에 뭔가 더 무거워졌다.저녁 먹고 설거지하다가 꺼냈다. "나 진짜 기획으로 넘어갈까 봐." 아내는 "응, 알아. 요즘 그 생각 많이 하는 거" 했다. 들켰다. 맨날 퇴근하고 PM 영상 보는 거. "연봉 깎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우리 먹고살 만해." 그 말이 고마웠다. 진짜로. 근데 그 순간 느꼈다. 아, 이제 진짜 결정해야 하는구나. 지지는 독 이상하다. 반대하면 더 하고 싶어질 텐데. 지지하니까 더 무섭다. 실패하면 누구 탓도 못 한다. 아내는 지지했으니까. 부모님은 반대했으니까. 친구들은 몰랐으니까. 결국 내 선택이다.다음 날 출근했다. 코드를 짰다. GPT한테 물어보고 복붙했다. '이거 5년 뒤에도 할 거야?' 점심시간에 기획자 선배한테 물어봤다. "PM 하려면 뭐부터 해야 하나요?" "경험이죠. 일단 해봐야 해요." "근데 경력 없으면 안 뽑잖아요." "그러니까 먼저 내부에서 기획 업무 좀 해보시든가." 결국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오후에 코드 리뷰했다. 주니어가 GPT로 짠 코드. 3일 걸릴 거 하루 만에. '아 나도 기획하면서 이렇게 AI 활용하면 되는 거 아냐?' 퇴근하고 집에 왔다. 아내가 물었다. "어땠어?" "음... 그냥." "결정했어?" "아직." 아내는 더 묻지 않았다. 저녁 먹고 각자 일했다. 나는 노션을 켰다. 'PM 포트폴리오 만들기' 페이지. 한 줄도 못 썼다. 책임의 무게 6200만원이다. 지금 연봉. 기획으로 가면 5000 초반? 4500? 계산했다. 월 100만원 차이. 1년에 1200. 아내 연봉이랑 합치면 괜찮다. 먹고는 산다. 근데 애 낳으면? 집 사면?주말에 부모님 댁 갔다. 아버지가 물었다. "요즘 일은 어때?" "괜찮아요." "개발자 좋은 거 아니냐. 너희 세대는." "네, 좋긴 한데요." 기획 얘기는 안 했다. 설명해도 이해 못 하실 거다. '개발자가 왜 기획을 해? 개발자가 더 잘 벌지.'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은. 5년 뒤는? 10년 뒤는? AI가 코드 다 짜면 개발자 연봉도 떨어진다. 당연하다. 근데 기획도 AI한테 대체되면? 그건... 좀 더 나중 아닐까? 아닐 수도 있다. 모른다. 결국 베팅이다. 어느 쪽이 덜 위험한지. 집에 오는 길에 아내한테 물었다. "나 진짜 해도 돼?" "뭘?" "기획 전환." "내가 하고 싶으면 해." 또 그 말이다. "근데 실패하면?" "그럼 다시 개발하든가." "6년 경력 공백 생기는 건데." "그래도 네가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단 낫지 않아?" 맞다. 근데 해보고 후회할 수도 있다.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 월요일 아침이다. 출근했다. 팀 회의가 있었다. 신규 기능 논의. 기획자가 발표했다. "사용자 니즈가 이래서요..." 나는 생각했다. '저 데이터 근거가 약한데. 저거 개발하면 아무도 안 쓸 텐데.' 말은 안 했다. 내 업무 아니니까. 개발 시작했다. GPT한테 물어봤다. 복붙했다. 수정했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거야?' 점심시간에 PM 채용공고 봤다. '기획 경력 3년 이상.' 내 이력서는 '개발 경력 6년.' 숫자만 봐도 안 맞다. 근데 사내 이동은? 팀장한테 말해볼까? '야 나 기획팀 가고 싶은데요.' '왜? 개발 안 맞아?' '아니요. 그냥... AI 때문에...' 설명할 자신이 없다. 오후에 코드 짰다. 또 GPT. 저녁 7시. 퇴근했다. 집에 와서 아내한테 말했다. "나 아직 결정 못 했어." "응." "미안." "뭐가?" "널 고민하게 해서." "나는 안 고민해. 네가 하는 거니까." 그 말이 제일 무섭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밤 11시다. 아내는 잤다. 나는 노션을 켰다. PM 포트폴리오 페이지. '사이드 프로젝트 기획안'이라고 썼다. 제목만 있다. 3주째. 왜 못 쓸까? 진짜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개발이 싫은 건가? 아니면 AI한테 지는 게 싫은 건가? GPT를 켰다. 물어봤다. "개발자가 기획으로 전환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답이 나왔다. 그럴싸하다. 근데 이런 거 물어보는 것도 우습다. AI한테 내 인생을. 창을 닫았다. 노션을 봤다. 빈 페이지. 한 줄 썼다. "왜 기획을 하고 싶은가?" 답을 모르겠다. 개발이 싫어서? 반만 맞다. 기획이 좋아서? 해본 적 없다. AI 때문에? 핑계일 수도. 그럼 진짜 이유는? 타이핑을 멈췄다. 이유를 모르면서 전환하려는 건가? 아니면 이유를 찾으려고 전환하려는 건가? 창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다. 아내가 자면서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잠꼬대다. 근데 또 그 말이다. 고맙다. 진짜로. 근데 나는 아직 모른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그래도 내일은 온다 화요일 아침이다. 출근했다. 코드를 짠다. 점심시간에 PM 영상을 본다. 저녁에 집에 온다. 노션을 킨다. 빈 페이지. 한 줄 쓴다. 지운다. 다시 쓴다. 아내가 묻는다. "결정했어?" "아직." "괜찮아." 괜찮다. 아직은. 근데 언제까지 아직이지?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이다. 개발을 계속하는 결정. AI 시대에 뒤처지는 결정. 아니면 신중한 결정? 모른다. 그냥 내일도 출근한다. GPT한테 코드 물어본다. 퇴근하고 PM 영상 본다. 노션에 한 줄 쓴다. 이게 답일까? 아니다. 근데 지금은 이게 전부다. 아내의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는 고맙다. 근데 그 말이 부담이다. 자유는 무겁다. 지지는 책임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솔직하게 말하면. 기획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개발이 불안한 것뿐일 수도. AI한테 지는 게 싫은 것뿐일 수도. 그래도 찾아야 한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시간이 걸려도.아내는 기다려준다. 나는 아직 결정 못 한다. 그게 지금의 전부다.

코딩 대신 기획을 선택했을 때 얻는 것과 잃는 것

코딩 대신 기획을 선택했을 때 얻는 것과 잃는 것

엑셀 시트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 기획자가 공유한 로드맵 엑셀을 봤다. Q1, Q2, Q3로 나뉜 제품 일정. 각 기능의 우선순위. 예상 매출 영향도. "이거 재밌겠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6년간 코드만 짰는데, 저런 시야로 일하면 어떨까. 그리고 바로 다음 생각. "근데 나 알고리즘 다 까먹겠네."잃는 것: 기술적 깊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획으로 가면 코딩 실력은 녹슬 것이다. 지금도 GPT 쓰면서 느낀다. 3개월 전엔 손으로 짰던 걸 지금은 프롬프트로 시킨다. 알고리즘 문제? 작년에 마지막으로 풀었다. 기획으로 가면 더 심해질 것이다. SQL 정도는 쓰겠지만, 새로운 프레임워크 공부는 안 할 것이다. 기술 블로그 읽는 시간에 시장 리포트를 읽을 것이다. 동기가 스타트업 CTO 됐다는 소식 들었다. 부럽긴 했다. 기술 리더로 가는 길. 나는 그 길을 포기하는 거다. "야, 넌 아직 FastAPI 신규 기능 다 알잖아." 팀장이 그랬다. 맞다. 아직은 안다. 근데 3년 뒤엔 모를 것이다. 기술 커뮤니티에서도 멀어질 것이다. 개발자 밋업 가면 뭔가 어색할 것이다. "나 이제 기획 쪽이야" 말하면 묘한 공기가 흐른다. 동료에서 외부인이 되는 느낌. 깊이를 잃는다. 전문성을 잃는다. 대신 뭘 얻는데? 얻는 것: 사업의 시야 어제 대표님과 회의했다. 신규 기능 개발 건. "이거 왜 만드는 거예요?" "사용자 요청이 많아서요." "근데 매출은 어떻게 늘어나는데요?" 대표님이 딱 그 표정 지으셨다. '이 친구 다르네' 하는 표정. 기획자는 이런 질문을 매일 한다. Why를 묻는다. 사용자는 왜 이걸 원하나. 경쟁사는 왜 저렇게 했나. 우리는 왜 이길 수 있나. 개발자는 How를 푼다. 어떻게 만드나. 어떻게 최적화하나. 두 개는 완전히 다른 근육이다.PM 하는 친구가 말했다. "넌 개발 6년 했으니까 유리해. 기술 한계 알잖아. 무리한 요구 안 해. 개발팀이 널 신뢰할 거야." 맞는 말이다. 순수 기획 출신은 가끔 황당한 요청을 한다. "이거 하루면 되죠?" 2주 걸리는 걸. 나는 그런 실수 안 할 것이다. 기술 부채 쌓이는 거 알고, 리팩토링 시간 필요한 거 알고, DB 마이그레이션 리스크 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제품 전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지라 티켓을 받는다. "로그인 API 성능 개선." 이게 전체 서비스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모른다. 그냥 한다. 기획은 다르다. 이 기능이 MAU를 얼마나 늘릴지 계산한다. 이탈률을 몇 %p 줄일지 예측한다. 3개월 뒤 OKR과 연결한다. 숲을 본다. 나무가 아니라. 돈 계산을 해봤다 현실적으로 따져봤다. 연봉. 지금: 6200만원. 개발 6년차 평균. 기획 전환 직후: 4500만원? 기획 신입 수준. 5년 뒤 개발자: 7500만원? (AI 영향 고려하면 불확실) 5년 뒤 PM: 8500만원? (시니어 PM, 프로덕트 오너) 계산이 맞나? 모른다. 변수가 너무 많다. 확실한 건, 단기적으론 손해다. 1700만원 줄어든다. 월 140만원. 적지 않다. 아내한테 말했다. "연봉 깎여도 괜찮아?" "5년 뒤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 5년 뒤를 봐야 한다. 근데 5년 뒤에 PM도 AI한테 대체되면? 그건 생각 안 하기로 했다. 그럼 답이 없다.정체성이 흔들린다 가장 어려운 건 이거다. 나는 6년간 "개발자"였다. 명함에도 그렇게 썼고, 자기소개할 때도 그랬다. "개발 뭐 해요?" "백엔드요, 파이썬." 이제 뭐라고 해야 하나. "기획 쪽으로 전환했어요." "아, 개발이 힘들어서요?" 아니, 힘들어서가 아니라... 설명하기 귀찮다. 주변 개발자들 반응도 묘하다. "야, 기획 가면 편하겠다. 코딩 안 해도 되잖아." 편해서 가는 게 아닌데. 다른 어려움이 있는데. 말해봐야 이해 못 한다. 부모님은 더 모르신다. "개발자가 좋은 거 아니야? 연봉도 높고." "요즘 AI가 대체한다니까요." "뭐? AI가 일을 해?" 설명 포기했다. 스스로도 헷갈린다. 나는 개발을 싫어하나? 아니다. 싫지 않다. 그냥 AI가 더 잘할 뿐이다. 기획을 좋아하나? 모른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상상으로만 좋아한다. 이게 맞는 선택인가? 모른다. 3년 뒤에 알 것이다. 기술 vs 사업, 양립은 불가능한가 가끔 생각한다. 둘 다 할 수는 없나. 테크 PM. 기술 이해도 높고 사업 감각도 있는.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지금 회사 PM 중에 개발 출신이 한 명 있다. 3년 차. 코드는 이제 안 짠다. SQL만 가끔. 기술 회의 때 의견은 내지만, 디테일은 모른다. "예전엔 다 알았는데, 이젠 감만 있어." 그가 말했다. 솔직한 말이었다. 결국 Trade-off다. 깊이를 버리고 넓이를 얻는다. 개발자는 1미터를 10미터 깊이로 판다. 기획자는 10미터를 1미터 깊이로 판다. 둘 다 10미터 깊이로? 불가능하다. 24시간은 모두에게 똑같다. 10년 뒤를 상상해봤다 2034년. 시나리오 1: 개발자로 남았다. AI가 코드 90%를 짠다. 나는 검수하고 아키텍처를 짠다. 시니어 역할. 연봉은 비슷하거나 소폭 하락. 수요는 줄었지만 시니어는 필요하다. 안정적이지만 성장 정체. 시나리오 2: 기획으로 전환했다. 프로덕트 오너가 됐다. 팀을 이끈다. 사업 전략을 짠다. AI 도구를 활용하지만 방향은 내가 정한다. 연봉은 상승. 불확실하지만 가능성 있다. 시나리오 3: 둘 다 망했다. AI가 모든 걸 대체했다. 개발도 기획도 필요 없다. 세 번째는 생각 안 하기로 했다. 그럼 뭘 해도 의미 없다. 현실적으로 1번과 2번 중 선택이다. 1번은 안전하다. 익숙하다. 검증됐다. 2번은 도전이다. 불확실하다. 더 재밌을 수도. 난 2번을 선택하려 한다. 왜냐면, 이미 1번의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 기획 문서를 하나 썼다 퇴근 후 집에서 2시간 동안 기획안을 작성했다. 회사 신규 기능 제안서. 문제 정의, 타겟 사용자, 기대 효과, 개발 공수, 우선순위 근거. 완성하고 나니 뿌듯했다. 코드 짤 때와는 다른 만족감. '이게 실제로 만들어지면, 사용자가 쓰면, 매출이 늘면.' 상상만으로도 재밌었다. 내일 팀장한테 보여줄까 말까 고민 중이다. "야, 넌 개발자잖아. 왜 이런 거 써?" 그럴 수도 있다. 근데 언젠간 말해야 한다. 기획으로 가고 싶다고. 연봉 깎이는 건 감수한다. 정체성 혼란도 견딘다. 기술 깊이 잃는 것도 받아들인다. 대신 얻고 싶다. 제품 전체를 보는 시야. 사업의 흐름을 읽는 감각. 사용자의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그게 앞으로 10년, 더 가치 있을 거라 믿는다. 틀릴 수도 있다. 3년 뒤 후회할 수도 있다. 근데 지금 이 자리에 그냥 있다간, 확실히 후회할 것 같다.내일 팀장한테 커피 한잔 하자고 할까. 진지하게 얘기 좀 하자고.

기술 채팅방에서 나가고 기획 카톡방에 들어간 날

기술 채팅방에서 나가고 기획 카톡방에 들어간 날

알림이 울리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출근 전에 폰을 봤다. 알림이 99+였던 기술 채팅방이 조용하다. 아니다. 채팅방은 시끄럽다. 내가 나간 거다. 지난주 금요일 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채팅방 나가기" 버튼. 3년 동안 매일 500개씩 알림이 쌓이던 그 방. Python 팁, FastAPI 업데이트, AWS 장애 공유, "GPT한테 물어봤더니" 시리즈. 매일 스크롤 올려가며 읽었다. 근데 요즘은 읽어도 안 읽어도 똑같더라. 나간 다음 날 아침. 폰이 가볍다. 알림 3개. 엄마, 아내, 쿠팡.그리고 새 채팅방 하나가 보인다. "PM 커리어 전환 모임". 어제 들어간 거다. 채팅방 목록이 말해준다 채팅방 목록을 위에서부터 봤다.PM 커리어 전환 모임 (new) 회사 전체 공지 개발팀 업무방 아내 부모님 대학 동기들 Python Korea (나감) Django 개발자 모임 (나감) 백엔드 주니어 멘토링 (나감)3개를 나갔다. 동시에. 대신 들어간 방.PM 커리어 전환 모임 프로덕트 오너 스터디 기획자 이직 정보방언제부터였을까. 채팅방 목록이 내 정체성을 대변한다는 걸 깨달은 게. 백엔드 개발자였던 사람의 채팅방 목록이 아니다. 이건.첫 메시지를 못 보냈다 PM 커리어 전환 모임. 들어가서 3일 동안 메시지를 못 보냈다. 99개 메시지가 쌓였다. 다들 자기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5년차 개발자입니다. AI 때문에 기획 전환 고민 중이에요." "반갑습니다. 개발 7년 했는데 코드 짜는 게 이제 의미 없어 보여서요." "저도 비슷합니다. GPT가 제 일을 다 하더라고요." 다 나랑 똑같다. 근데 메시지를 못 보내겠다. 키보드 앞에서 10분을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6년차 백엔드 개발자입니다. 최근에 PM 전환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작성. 지움. 작성. 지움. 왜 못 보내는 거지? 아. 이걸 보내는 순간, 나는 "PM 전환을 고민하는 개발자"가 된다. 온라인에서도. 공식적으로. 금요일 밤에 보냈다. 퇴근하고 소주 반 병 마시고. 개발팀 단톡방의 미묘함 월요일 오전. 회사 개발팀 단톡방. "한기획님 이거 API 스펙 확인 좀 부탁드려요." 예전 같으면 바로 답했다. "네 확인했습니다. 수정 반영할게요." 근데 이번엔 30분 뒤에 답했다. 지금 기획 문서 쓰고 있었거든. "아 네. 오후에 확인하고 공유드릴게요." 팀장이 물었다. "기획님 요즘 바쁘세요?" "네 조금요." 거짓말이다. 안 바쁘다. 근데 예전처럼 코드에만 매달리고 싶지 않다. 개발팀 단톡방 알림을 껐다. 1시간에 한 번씩 확인하기로 했다.예전에는 5분마다 봤다. 검색 기록이 달라졌다 구글 검색 기록을 봤다. 3개월 전:"FastAPI async performance" "AWS Lambda cold start 해결" "Python type hints 모범 사례" "Redis pub/sub vs Kafka"지금:"개발자 출신 PM 이직" "기획 경력 없이 PM 되는 법" "프로덕트 오너십이란" "PM 포트폴리오 작성법"유튜브 시청 기록도 마찬가지다. 3개월 전:"클린 아키텍처 설명" "도커 컴포즈 활용" "FastAPI 프로젝트 구조"지금:"PM이 하는 일" "개발자에서 기획자로" "사용자 인터뷰 방법론" "로드맵 작성 실전"브라우저 북마크도 정리했다. "개발 레퍼런스" 폴더를 접고, "PM 자료" 폴더를 펼쳤다. 이게 정체성의 변화구나. 링크드인 프로필 수정 지난주 목요일 밤. 링크드인 프로필을 고쳤다. 예전 소개: "Backend Developer | Python, Django, FastAPI | 6 years experience" 바꾼 소개: "Backend Developer transitioning to Product Management | 6 years in tech | Interested in user-centered product development" "transitioning to Product Management" 이 한 줄을 쓰는 데 1시간 걸렸다. 저장 버튼 누르기 전에 10번 다시 읽었다. 누르고 나니까 세상이 알았다. 내가 전환 중이라는 걸. 다음 날 알림 2개. PM 리크루터 2명이 프로필을 봤다. 근데 메시지는 없다. 당연하지. 기획 경력 0년인데. 노션 워크스페이스 이름 개인 노션 워크스페이스 이름을 바꿨다. 예전: "Dev Notes" 지금: "Product & Dev" 워크스페이스 안 페이지 구조도 바뀌었다. 예전: 📁 개발 공부 - Python - Django - AWS 📁 프로젝트 - API 개발 - 성능 최적화지금: 📁 PM 준비 - 기획 공부 노트 - PM 인터뷰 준비 - 포트폴리오 📁 개발 (접음) - Python - Django"개발" 폴더를 접었다.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6년이 들어있는데. 근데 더 이상 매일 펼치지 않는다. 채팅방 메시지 톤이 달라졌다 개발팀 단톡방에서 내 말투가 바뀌었다. 예전: "이 부분 비동기 처리하면 성능 10배 나아질 것 같은데요." "API 스펙 수정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려요." "로직 리뷰 완료했습니다." 지금: "이 기능 사용자 입장에서 필요할까요?" "이 플로우 기획 의도가 뭐였죠?" "사용자 시나리오 문서 있으면 공유 부탁드려요." 팀원들이 느낀다. 확실히. 팀장이 슬랙 DM 보냈다. "기획님 요즘 관점이 많이 바뀌신 것 같아요. 기획 쪽에 관심 있으세요?" "네. 조금요." "좋은 것 같아요. 개발자 출신 PM이 요즘 많이 필요하던데." 팀장도 안다. 내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사이드 프로젝트 노션 개인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혼자. 예전 같으면 바로 코드부터 짰다. FastAPI 프로젝트 생성. DB 스키마 설계. API 엔드포인트 작성. 이번엔 코드를 안 짰다. 2주 동안. 대신 노션에 이것만 썼다.타겟 사용자 정의 문제 정의 해결 방안 기능 우선순위 사용자 플로우 와이어프레임 (피그마로) 기술 스택 선정 이유 (맨 마지막)코드는 GPT한테 시킬 거다. 나는 기획만. 이게 PM이 하는 일이구나. 금요일 저녁의 다른 기분 금요일 저녁 7시. 퇴근. 예전에는 "이번 주도 코드 쳤다" 기분. 이번 주는 "사용자 시나리오 3개 작성했다" 기분. 둘 다 일을 했는데 기분이 다르다. 코드 칠 때는 GPT가 나보다 10배 빠르다는 생각. 내가 왜 하지? 기획 쓸 때는 "이건 나만 할 수 있다" 기분. GPT는 내 의도를 모른다. 주말에 PM 인강을 들었다. "사용자 인터뷰 방법론". 예전에는 "클린 코드" 인강 들었다. 지금은 재밌다. 예전보다. 아내와의 대화 일요일 저녁. 아내가 물었다. "요즘 되게 달라진 것 같아." "뭐가?" "말하는 것도. 폰 보는 것도. 일 얘기할 때 눈빛도." "그래?" "응. 예전엔 '오늘 코드 이거 짰어' 이런 얘기만 했잖아. 요즘은 '사용자가 이럴 것 같아' 이런 얘기 하더라." 맞다. 나도 느낀다. "바뀌고 있는 것 같아. 조금씩." "좋은 쪽으로?" "모르겠어. 근데 예전보다는 재밌어." "그럼 됐다." 아내도 안다. 내가 전환 중이라는 걸. 채팅방 목록부터. 검색 기록부터. 말투부터. 정체성은 작은 것들의 합 개발자 채팅방 3개를 나갔다. PM 채팅방 3개에 들어갔다. 링크드인 소개를 바꿨다. 노션 워크스페이스 이름을 바꿨다. 구글 검색어가 달라졌다. 말투가 달라졌다. 이게 정체성의 변화다. 어느 날 갑자기 "나 이제 PM이야" 선언하는 게 아니다. 작은 것들이 하나씩 바뀐다. 매일. 조금씩. 그리고 어느 순간 돌아보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6개월 전 내 채팅방 목록과 지금 내 채팅방 목록은 다르다. 그게 전부다.온라인 정체성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채팅방 목록이 날 말해준다.

PM이 되려면 '경력 3년 이상'이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개발자는 어디에나 있는 이유

PM이 되려면 '경력 3년 이상'이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개발자는 어디에나 있는 이유

PM이 되려면 '경력 3년 이상'이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개발자는 어디에나 있는 이유 공고를 보다가 채용 공고를 본다. 개발자 공고 50개, PM 공고 5개. 개발자: "주니어 환영", "신입 가능", "성장하고 싶은 분" PM: "3년 이상", "유관 경력 필수", "프로젝트 리딩 경험" 똑같이 IT 직군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궁금했다. 아니, 솔직히 짜증 났다. 내가 6년 동안 개발했는데 기획은 신입으로도 못 가냐고. 그런데 생각해봤다. 시장은 감정이 없다. 이유가 있을 거다. 개발자가 흔한 이유 첫째, 만들 수 있다. 부트캠프 6개월 하면 뭐라도 만든다. 토이 프로젝트, 클론 코딩, 포트폴리오. 눈으로 보인다. "이 사람 할 줄 아네" 판단이 쉽다. 둘째, 검증이 빠르다. 코딩 테스트 보면 3시간 만에 실력 나온다. 알고리즘 풀어, 프로젝트 만들어, 깃헙 보여줘. 끝. 틀리면 틀렸다고 바로 나온다. 컴파일 에러, 테스트 실패, 버그. 명확하다.셋째, 교육 인프라가 있다. 학원, 부트캠프, 유튜브, 인강. 코딩 배우는 루트는 천 개다. "파이썬 배우고 싶어요" 검색하면 무료 강의 100개 나온다. 패스트캠퍼스, 코드잇, 노마드코더. 선택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주니어 개발자는 계속 공급된다. 시장이 원하니까 만들어진다. 넷째, 스케일이 안 된다. 개발자 1명이 100명 몫 못 한다. GPT 시대에도 누군가는 프롬프트 짜고, 코드 검수하고, 배포하고, 유지보수한다. 회사는 개발자가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니어도 뽑는다. 키우면 되니까. PM이 귀한 이유 첫째, 만들 수가 없다. PM 포트폴리오가 뭐냐. 기획서? PRD? 로드맵? 그거 혼자 써봤자 검증이 안 된다. 실제로 출시됐냐, 성과 냈냐가 중요한데 그건 회사 안에서만 가능하다. "저 혼자 기획해서 유저 10만 모았어요" - 이러면 뽑는다. 근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냐.둘째, 검증이 느리다. 기획은 3개월 뒤에 결과가 나온다. 출시하고, 유저 반응 보고, 데이터 쌓이고. 그 전까지는 "좋은 기획인지 나쁜 기획인지" 아무도 모른다. 면접에서 "이 사람 PM 잘하겠네" 판단이 어렵다. 말은 누구나 잘한다. 셋째, 교육 인프라가 없다. PM 학원 없다. 부트캠프도 최근에 생긴 거 몇 개. 그것도 "실무 경력자 환영"이다. "PM 되고 싶어요" 검색하면 나오는 거? 추상적인 조언. "사용자 중심으로 생각하세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요". 구체적인 방법론은 회사에서 배운다. OKR, 스프린트, 백로그, 우선순위. 실전이 교육이다. 그러니까 PM은 회사 안에서 자란다. 밖에서 키워질 수가 없다. 넷째, 스케일이 된다. 좋은 PM 1명이 10개 프로젝트 망하는 걸 막는다. 나쁜 PM 1명은 30명 개발팀 3개월 날린다. 회사는 PM을 신중하게 뽑는다. 실수하면 비용이 크니까. 시장의 로직 정리하면 이렇다. 개발자는 "만들어지는" 직군이다. 교육하면 나온다. 검증하면 쓸 만한 애들 걸러진다. 회사는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니어도 뽑는다. PM은 "자라는" 직군이다. 회사 안에서 경험 쌓아야 한다. 실패 비용이 크다. 회사는 적게 필요하다. 그래서 경력자만 뽑는다.시장은 냉정하다. 감정 없다. 수요와 공급, 리스크와 리턴만 계산한다. 나는 이게 이해가 됐다. 억울하지만 논리는 맞다. 그럼 나는 어떻게 6년 개발했다. 이제 PM 하고 싶다. 근데 신입 PM 자리는 없다. 방법은 세 가지다. 1. 사내 전환 지금 회사에서 PM으로 옮긴다. 제일 현실적이다. 개발 경력이 증명이 된다. "쟤 6년 했으니까 시스템은 이해하겠네", "개발팀이랑 소통은 되겠네". 인사팀한테 말한다. "PM 해보고 싶습니다, 기회 주세요". 6개월 시범 운영도 좋다. 리스크: 회사에 PM 자리가 없으면 끝이다. 아니면 몇 년 기다려야 한다. 2. PM 필요한 스타트업 시리즈 A, B 정도 스타트업. 개발자는 있는데 기획자가 없는 곳. "개발 경력 6년, PM 전환 희망"이라고 쓴다. 일부는 관심 있다. 연봉은 깎인다. 6200에서 5000 정도? 근데 타이틀은 PM이다. 리스크: 스타트업 망하면 경력 1년도 안 쌓고 튕긴다. 3. PO 포지션 노리기 Product Owner, Technical PM 이런 자리. 개발 백그라운드 환영하는 곳. 대기업, 중견 플랫폼 회사에 종종 있다. 개발 + 기획 하이브리드. 완전한 PM은 아니지만 발 들이기엔 좋다. 리스크: 자리가 진짜 적다. 공고 보기 힘들다. 나는 1번 준비 중이다. 팀장한테 슬쩍 얘기했다. "요즘 기획 쪽에 관심이 생겨서요". 반응은 애매했다. "음... 그래? 근데 개발도 잘하잖아". 그래, 잘한다. 근데 GPT가 나보다 10배 빠르다. 이건 말 안 했다. 착각하지 말 것 PM이 개발자보다 쉬운 거 아니다. 어떤 개발자는 착각한다. "코딩보다 기획이 쉽겠지, 말만 잘하면 되잖아". 아니다. PM은 책임이 무겁다. 프로젝트 망하면 PM 탓이다. 개발자는 "기획이 이상했어요" 하면 된다. PM은 정답이 없다. 코드는 돌아가면 맞는 거다. 기획은 출시해도 맞는지 모른다. PM은 설득이 일이다. 개발팀, 디자인팀, 경영진, 고객. 하루 종일 설득한다. 내가 PM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근데 개발은 확신이 없다. AI가 더 잘한다. 이건 확실하다. 5년 뒤 개발자 연봉은 내려간다. 공급이 늘어나고, AI가 대체한다. 시니어 개발자는 살아남는다. 아키텍처 짜고, 주니어 관리하고, AI 검수하는 사람. 주니어, 미들은? 글쎄. PM은 어떨까. AI가 PRD 써주고, 로드맵 짜주고, 데이터 분석해준다. 그래도 "뭘 만들지" 결정은 사람이 한다. 책임도 사람이 진다. 당분간은. 나는 그쪽에 베팅한다. 틀릴 수도 있다. 5년 뒤에 "개발 계속 할걸" 후회할 수도 있다. 근데 지금 이대로는 5년 못 버틴다. 확신이 없다. 시장을 이해하면 억울해하지 않게 된다. "왜 PM 신입은 안 뽑냐"고 화내지 않는다. 시장의 로직을 안다. 대신 전략을 짠다. 어떻게 경력을 만들지. 어떻게 검증을 받을지. 어떻게 리스크를 줄일지. 나는 지금 회사에서 기획 문서를 쓴다. 아무도 안 시켰다. 그냥 쓴다. 다음 스프린트 제안서, 기능 개선 PRD, 데이터 기반 우선순위 분석. 노션에 쌓인다. 팀장이 본다. "오, 이거 괜찮은데?" 한다. 1년 뒤에 "PM 해보고 싶어요" 말할 때 근거가 된다. "제가 이미 6개월 동안 이런 거 해봤거든요". 시장은 냉정하다. 하지만 룰은 있다. 룰을 이해하면 게임을 할 수 있다.공고를 보다가 빡쳤다. 이제는 전략을 짠다. 시장이 원하는 걸 만든다.

회사에서 자발적으로 기획 문서를 쓰면서 테스트해본 전환

회사에서 자발적으로 기획 문서를 쓰면서 테스트해본 전환

실험 시작 3개월 전부터 회사에서 몰래 기획을 해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몰래'는 아니다. 그냥 아무도 안 물어봤을 뿐. 계기는 간단했다. 새 기능 개발 회의에서 기획자가 "개발 가능한지 검토 부탁드려요" 했다. 기획서를 봤는데 뭔가 이상했다. API 구조가 비효율적이었다. 데이터베이스 설계를 생각 안 한 기획이었다. '이거 다시 짜야 하는데...' 그날 퇴근하고 노션을 켰다. 내가 생각하는 기획안을 써봤다. 2시간 걸렸다. 재밌었다. 다음 날 팀장한테 "제가 다른 방향으로 기획해봤는데요" 했다. 팀장이 봤다. "오 이게 낫네요. 기획팀한테 공유해보죠." 기획자는 별로 안 좋아했다. 당연하다. 개발자가 참견한 거니까. 하지만 그 기능은 내 방식대로 개발됐다. 그때부터 중독됐다.기획이 뭔지 알았다 기획은 생각만큼 추상적이지 않았다. 책에서 본 '사용자 니즈', '페르소나', '저니맵' 이런 거 말고. 실제로는 SQL 쿼리 짜듯이 로직을 짜는 거였다. "사용자가 A를 클릭하면 B 화면으로 간다. B에서 C 조건이 충족되면 D 액션이 실행된다." 코드랑 똑같다. 다만 파이썬 대신 한글로 쓰는 것. 두 번째 기획 문서를 쓸 땐 피그마도 썼다. 화면 설계를 직접 그렸다. 디자이너한테 물어보면서. "이거 여기 버튼 크기 괜찮아요?" "여기 여백 8px 맞아요?" 디자이너가 신기해했다. "개발자분이 피그마를 쓰세요?" "요즘 배우는 중이에요." 거짓말은 아니다. 유튜브 보면서 3일 배웠다. 세 번째 기획은 아예 처음부터 내가 제안했다. "이 기능 이렇게 만들면 어떨까요?" 회의 시간에. 팀장이 "좋네요, 문서화해서 올려보세요." 그렇게 공식적으로 내 기획이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개발은 다른 팀원이 했다. 나는 기획자처럼 검수했다. "여기 버튼 위치 바꿔주세요." "이 에러 메시지 문구 수정이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코드를 짤 때보다.개발이 시시해졌다 그 이후로 코딩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재미없다'기보다 '의미없다'는 느낌. API 하나 짜는데 2시간 걸렸다. 예전에는 3시간 걸렸을 거다. 그런데 중간에 GPT한테 시켰다. 30분 만에 80% 완성. 나머지 1시간 30분은 검수하고 수정. '내가 한 게 뭐지?' 기획할 때는 안 그랬다. 기획 문서 쓸 때는 GPT가 별로 도움이 안 됐다. "이 기능의 우선순위를 정해줘" 물으면 뻔한 대답만 했다. 사용자 흐름도 GPT는 맥락을 몰라서 이상하게 짰다. 기획은 아직 내 머리가 필요했다. 개발은 점점 덜 필요했다. 한 달 전쯤. 주니어한테 "이 기능 개발 부탁" 했다. 그 친구가 코파일럿 켜놓고 1시간 만에 끝냈다. 내가 3시간 걸렸을 거다. '아 나보다 빠르네.' 아니다. '코파일럿이 나보다 빠르네.' 그날 저녁 아내한테 말했다. "나 기획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아내가 물었다. "재밌어?" "응. 코딩보다 재밌어." 처음으로 확신했다. 기획자들의 반응 기획팀 사람들은 미묘했다. 처음엔 "개발자분이 기획까지 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했다. 좋은 말이지만 뉘앙스가 좀 이상했다. '네가 왜 우리 일을?' 두 번째부턴 "여기 이렇게 하면 개발 공수가 줄어들죠?" 물었다. "네, 그렇죠." "그럼 이렇게 할게요." 기획이 내 의견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세 번째부턴 회의에 나를 불렀다. "한기획 님, 이거 기술적으로 가능해요?" "가능한데 이렇게 하면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오케이, 그렇게 진행하죠." 네 번째부턴 기획자가 먼저 물었다. "한기획 님, 이 기능 기획하실래요?" 그때 알았다. 내가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기획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기획 쪽으로 전환 생각 있으세요?" "생각 중이긴 한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단 지금처럼 하시면 될 것 같아요. 포트폴리오 쌓이잖아요." 포트폴리오. 그렇구나. 내가 지금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었구나.재미의 정체 왜 기획이 재밌는지 생각해봤다. 첫째, 결과가 빨리 보인다. 코드는 짜고 테스트하고 배포하고 버그 잡고. 2주 걸린다. 기획은 쓰고 회의하고 확정되면 끝. 3일. 둘째, 사람들이 반응한다. 코드는 아무도 안 본다. 잘 짜도 "오 깔끔하네요" 한마디. 기획은 회의 때 "이거 좋은데요?" "이렇게 하면 더 나을 것 같아요" 의견이 나온다. 살아있는 느낌. 셋째, 전체가 보인다. 개발할 땐 내 파트만 본다. API 하나. 화면 하나. 기획할 땐 전체 흐름을 본다. 사용자가 앱을 켜고 로그인하고 상품을 보고 결제한다. 그 전체를 설계한다. 마치 레고 설명서를 만드는 거다. 개발은 레고 조각을 끼우는 거고. 나는 설명서 만드는 게 더 재밌었다. 넷째, AI가 덜 위협적이다. 솔직히 이게 제일 크다. GPT는 코드를 잘 짠다. 점점 더 잘 짤 거다. 하지만 "우리 서비스에 이 기능이 필요한 이유"는 GPT가 모른다. "이 버튼을 여기 둬야 하는 이유"도 모른다. 기획은 맥락이다. 맥락은 아직 AI가 못 한다. 적어도 당분간은. 개발이 아까운가 6년을 개발했다. 파이썬, Django, FastAPI, PostgreSQL, Redis, Docker, AWS. 다 배웠다. 이제 버린다고? 아깝긴 하다. 하지만 버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기획할 때 개발 지식이 무기가 됐다. "이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해요"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개발 2주 줄어들어요"를 제안할 수 있었다. 일반 기획자는 못 한다. 개발자 출신이니까 가능한 거다. 그리고 코딩을 완전히 안 하는 것도 아니다. 간단한 프로토타입은 내가 직접 짠다. "이런 느낌입니다" 하면서 보여주면 팀이 이해가 빠르다. 개발 6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획의 베이스가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덜 아까웠다. 현실적 문제들 물론 장미빛은 아니다. 첫째, 연봉. 개발자로 이직하면 7500은 받는다. PM 신입은 4500부터 시작이다. 3000만원 차이. 근데 5년 뒤를 생각하면? AI가 주니어 개발자 일을 다 하면? 그때 개발자 몸값은 얼마일까? PM은? 아직은 안전해 보인다. 적어도 3년은. 둘째, 경력 인정. 개발 6년이 기획 경력으로 인정될까? 회사마다 다르다. 어떤 곳은 "개발자 출신 환영"이다. 어떤 곳은 "기획 경력 3년 필수"다. 운이다. 셋째, 정체성. 나는 개발자인가 기획자인가. 명함에는 백엔드 개발자. 하는 일은 반반. 애매하다. 이직할 때 이력서에 뭐라고 쓰지? "개발 가능한 PM"? 그런 포지션이 있나? 찾아봤다. 있다. "테크니컬 PM". "프로덕트 엔지니어". 희망이 보였다. 6개월 계획 일단 지금 회사에서 1년 더 있기로 했다. 그동안 기획 문서를 최소 10개 쓴다. 실제로 개발된 기능으로. 그게 포트폴리오다. 피그마 실력을 중급까지 올린다. 와이어프레임 정도는 혼자 뚝딱. PM 관련 책 10권 더 읽는다. 지금까지 10권. 총 20권이면 이론은 충분하다. 사이드 프로젝트 하나 기획부터 끝까지. 작게. MVP. 실제로 런칭까지. 그리고 1년 뒤 이직한다. 테크니컬 PM으로. 연봉은 아마 6000 정도? 지금이랑 비슷하다. 괜찮다. 5년 뒤를 보는 거다. 아내는 찬성했다. "네가 행복하면 돼." 부모님은 여전히 이해 못 한다. "개발자가 좋은 직업인데..." 괜찮다. 내 인생이니까. 테스트 결론 3개월간 기획을 해봤다. 결론: 재밌다. 개발보다 재밌다. 정확히는 '나한테는' 재밌다. 모든 개발자한테 맞는 길은 아니다. 코딩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계속 개발하면 된다. AI 시대에도 10배 엔지니어는 필요하다. 나는 아니었다. 나는 코딩이 좋았던 게 아니라 '뭔가를 만드는 것'이 좋았던 거다. 그리고 기획이 더 많은 걸 만들 수 있었다. 적어도 내 능력으로는. 아직 확신은 아니다. 80% 정도. 남은 20%는 실제로 PM이 되고 1년 일해봐야 안다. 그래도 테스트는 성공이다. 회사에서 몰래 기획해보길 잘했다. 이직하고 나서 '아 이거 아닌데' 하는 것보단 낫다.실험은 계속된다. 출근길에 PM 팟캐스트 들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