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AI가 다 해주는데...'가 내 입버릇이 된 시점
- 15 Dec, 2025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가 내 입버릇이 된 시점
처음 입에 붙은 순간
6개월 전이었다. 주니어가 내 옆자리에 앉아서 작업했다.
“선배님, 이 API 어떻게 짜면 좋을까요?”
나는 당연히 구조부터 설명하려고 했다. 근데 그 친구가 먼저 GPT 창을 켰다.
“일단 물어봐야죠.”
5분 후. 작동하는 코드가 나왔다.
내가 설명하려던 거랑 거의 똑같았다. 아니, 더 깔끔했다.
그때 처음 말했다.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뒤에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웃었다.

주니어는 그 뒤로도 계속 GPT를 썼다. 함수 네이밍, 에러 디버깅, 테스트 코드 작성.
내가 3시간 걸릴 거 1시간 만에 끝냈다.
“선배님도 쓰시면 되는데…”
맞다. 나도 쓰면 된다.
근데 왜 기분이 이상했을까.
두 번째로 말했을 때
1달 후. 팀 회의였다.
기획자가 물었다. “이 기능 구현 얼마나 걸려요?”
예전 같으면 “3일이요” 했을 것이다.
근데 이제는 달랐다. GPT한테 물어보면 하루 만에 나온다는 걸 알았다.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하루면 될 것 같아요.”
기획자 눈이 반짝였다. “오, 빨라졌네요!”
내 눈은 반짝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실제로 GPT한테 물어봤다. 요구사항 복붙하고, 기술스택 알려줬다.
30분 만에 70% 나왔다. 나머지 30%만 내가 수정했다.
하루도 안 걸렸다.
칭찬받았다. “한기획 님 속도 진짜 빨라졌어요.”
고맙다고 했다. 속으로는 ‘내가 한 게 뭐지?’ 생각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열 번째
그 뒤로 입버릇이 됐다.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 코드 리뷰할 때
- 신규 기능 논의할 때
- 후배 교육할 때
- 이력서 쓸 때
- 아내한테 불평할 때
심지어 부모님 전화에서도.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개발자가 뭐 하냐고.”
엄마는 못 알아들으셨다. “그럼 네가 편하겠네?”
편한가? 모르겠다.
작업은 빨라졌다. 야근은 줄었다. 퇴근 후 시간이 생겼다.
근데 뇌가 안 돌아간다. 예전엔 코드 짤 때 머리가 복잡했다. 구조 고민하고, 변수명 고민하고.
지금은? GPT한테 물어보고, 답 보고, ‘오 괜찮네’ 하고 복붙.
머리가 편하다. 너무 편하다.
무섭다.
Stack Overflow 트래픽 30% 감소
기사 봤다. Stack Overflow 방문자 30% 빠졌다고.
개발자들이 GPT한테 물어보니까.
댓글 봤다.
“당연하지, 누가 스택오버플로우 가냐” “GPT가 더 친절함” “답변 기다릴 필요도 없고”
맞는 말이다. 나도 3개월째 Stack Overflow 안 들어갔다.
근데 생각했다.
‘5년 뒤엔 주니어 개발자 채용 공고도 30% 줄어들까?’
그 생각이 머리에서 안 떠났다.

입버릇이 진짜 바꾼 것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이 말 자주 하다 보니까. 진짜로 믿게 됐다.
AI가 다 해준다고.
그럼 나는?
처음엔 농담이었다. 자조적 유머.
한 달 지나니 불안이었다.
두 달 지나니 확신이었다.
‘개발자로 5년 더 하면 안 되겠다.’
그래서 기획 책 샀다. 10권.
PM 되는 법, 프로덕트 오너십, 사용자 인터뷰 가이드.
퇴근 후 읽는다. 주말에도 읽는다.
개발자 커뮤니티는 안 본 지 오래다. 이제 PM 커뮤니티 본다.
‘기획은 AI가 못 하지 않을까?’
근데 확신은 없다.
요새는 AI가 기획 문서도 쓴다. PRD도 작성한다.
그래도 개발보단 나을 것 같다. 아니, 나아야 한다.
그렇게 믿는다.
회의 시간에 기획자 보는 눈
요즘 회의 때 기획자 말에 집중한다.
예전엔 ‘빨리 끝나라’ 생각했다.
지금은 ‘저렇게 말하는구나’, ‘저 로직은 왜 저렇게 짰을까’ 생각한다.
기획자가 발표한다. “이 플로우가 사용자 경험상 최적일 것 같습니다.”
속으로 생각한다. ‘저기 엣지 케이스 빠졌는데.’
예전엔 말했다. “여기 예외 처리 필요합니다.”
요즘엔 말 안 한다. 나중에 슬랙으로 보낸다. 친절하게.
“혹시 이 케이스는 고려하셨나요? 개발하다 보니 이런 경우도 있더라고요.”
기획자가 고맙다고 한다. “역시 개발자 출신이 이런 거 잘 잡아내시네요.”
기분 좋다.
‘아, 나도 저쪽 일 할 수 있겠다.‘
노션에 만든 사이드 프로젝트 기획서
2주 전. 주말에 노션 켰다.
사이드 프로젝트 하나 기획해보기로 했다.
주제: 개발자 커리어 전환 돕는 서비스.
타겟 유저: 나 같은 사람들.
페르소나 작성했다. 32세, 개발 6년차, AI 때문에 불안, 기획 전환 고민.
완전 내 얘기다.
문제 정의, 솔루션, 핵심 기능, MVP 범위, 로드맵.
4시간 걸렸다. 재밌었다.
코딩보다 재밌었다.
이게 확신을 줬다.
‘나 진짜 기획 하고 싶은가 보다.’
아내한테 보여줬다.
“어때? 내가 이런 거 기획해봤어.”
아내는 마케터다. 기획 문서 많이 본다.
“오, 괜찮은데? 근데 경쟁사 분석은?”
경쟁사 분석 빠졌다.
“아 맞다.”
추가했다. 비슷한 서비스 3개 찾아서 분석했다.
또 2시간 걸렸다. 그것도 재밌었다.
“이 정도면 PM 지원해도 되는 거 아니야?”
아내가 말했다. “근데 경력이…”
맞다. 경력이 없다.
이력서에 ‘PM 희망’이라고 쓸까
이직 사이트 켰다.
‘프로덕트 매니저’ 검색.
공고 10개 봤다. 9개가 ‘기획 경력 3년 이상’.
1개가 ‘개발 경력자 우대’.
그 1개 지원했다.
자소서에 썼다.
“6년간 개발하며 기술과 비즈니스를 모두 이해하게 됐습니다. 최근 6개월간 PM 전환을 준비하며…”
거짓말은 아니다.
근데 쓰면서 생각했다.
‘이게 통할까?’
서류 탈락했다.
2주 뒤 답 왔다. “적합한 경력을 갖춘 지원자가…”
예상했다. 그래도 실망했다.
개발자 공고는 서류 통과율 80%다. 6년차면.
기획 공고는 0%다. 경력이 없으니까.
그래도 계속 말한다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오늘도 말했다. 팀 미팅에서.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우리가 집중할 건 뭘까요?”
리드 개발자가 웃었다. “한기획 씨 요새 그 말 많이 하네.”
들켰다.
“아, 그래요? 습관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그래서 뭐 할 건데?”
질문이었다.
뭐 할 건데?
대답 못 했다.
회의 끝나고 생각했다.
나는 뭘 하고 싶은가.
AI한테 안 빼앗길 일.
AI가 못 하는 일.
아니다. AI가 잘해도 상관없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
아내와의 대화
저녁 먹으면서 말했다.
“나 진짜 기획 하고 싶은가 봐.”
아내가 물었다. “개발은 싫어?”
“싫은 건 아닌데… AI가 더 잘하잖아.”
“그럼 기획은 AI가 못 해?”
말문이 막혔다.
“잘 모르겠어. 근데 개발보단…”
“그럼 그냥 AI가 개발 다 하게 두고, 넌 감독만 하면 안 돼?”
생각 못 한 관점이었다.
“그게… PM이잖아.”
“맞네.”
우리 둘다 웃었다.
“근데 PM도 AI가 나중엔 하지 않을까?”
아내가 말했다. “그럼 그때 또 바꾸지 뭐.”
맞다. 그때 또 바꾸지 뭐.
개발자 친구의 반응
대학 동기한테 전화했다.
같이 개발 공부했던 친구. 지금은 대기업 시니어 개발자.
“나 요즘 기획 쪽 알아보는데…”
친구가 웃었다. “야, 너 연봉 6200 받잖아. 기획 가면 5000도 안 줄걸?”
“알아. 근데…”
“근데?”
“AI가 점점 코드를 더 잘 짜는데, 5년 뒤엔 어떻게 되려나.”
친구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나도 그 생각 한다.”
침묵.
“근데 나는 그냥 계속 개발할 거야. AI 쓰면서.”
“그것도 방법이지.”
“너는 기획이 좋아?”
좋은가?
“모르겠어. 근데 개발보다는 재밌을 것 같아.”
“그럼 해봐. 근데 쉽지 않을 거야.”
알고 있다.
내 입버릇이 나를 바꿨다
결론은 이거다.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이 말을 계속하다 보니까.
진짜로 변화하고 있다. 나 자신이.
처음엔 농담.
지금은 내 행동 지침.
기획 책 10권 읽은 것도.
노션에 프로젝트 기획서 쓴 것도.
이력서에 PM으로 지원한 것도.
다 이 말 때문이다.
입버릇이 생각을 바꿨고.
생각이 행동을 바꿨고.
행동이 나를 바꾸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출근했다.
스탠드업 미팅.
“오늘 이 기능 작업할 거예요.”
누가 물었다. “얼마나 걸려요?”
나는 대답했다.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오후에 끝낼게요.”
다들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근데 속으로는 다른 생각.
‘이 일 언제까지 할까?’
‘기획은 언제쯤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AI랑 같이 개발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하나.
이 말 계속할 것 같다.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이게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보려고.
입버릇이 된다는 것
말이 습관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지나면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이미 지났다.
“요즘 AI가 다 해주는데…”
이 말은 이제 내 일부다.
불안의 표현이자, 변화의 신호.
도망이자, 도전.
6개월 전엔 농담이었다.
지금은 진담이다.
6개월 후엔 뭐가 될까.
행동일까, 결과일까.
아니면 후회일까.
계속 말하면서 찾아볼 것이다.
오늘 코파일럿이 함수 3개 자동완성 해줬다. 고맙다고 말했다. 컴퓨터한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