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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02 Dec, 2025
주니어가 하루 만에 끝낸 걸 내가 3일 걸렸던 날
주니어가 하루 만에 끝낸 걸 내가 3일 걸렸던 날 평상일처럼 시작된 월요일 오전 10시. 난 기획팀에서 넘어온 새로운 기능 명세서를 들고 개발팀 자리로 돌아왔다. 결제 시스템 개선 작업이었다. 난도가 있지만 충분히 내 경험 범위 안이라고 생각했다. 6년을 개발자로 일했으니까. 백엔드 팀장인 나는 당연히 이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할 거라고 예상했다. "한 번 봐 줄래?" 신입 개발자 김준영이 내 자리에 가져온 문서를 본 건 금요일 오후 3시쯤이었다. 나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일을 거의 온종일 이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AWS 아키텍처 설계, 데이터베이스 스키마 변경, API 엔드포인트 설계, 예외 처리까지. 내가 만족할 만한 구조가 나올 때까지 계속 수정했다. 중간중간 코드 리뷰도 받았고, 혹시 놓친 부분이 있을까 봐 선임들한테도 물어봤다. 일이라는 게 이런 거다. 신중함과 경험이 정말 중요한 거다. 그런데 그 신입이 건넨 문서를 보고 내 얼굴이 굳었다. 명세서를 정확히 파악한 설계, 깔끔한 데이터 모델링, 예외 처리까지 전부 들어가 있었다. 내가 4일 동안 고민해서 만든 것과 거의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더 체계적이었다. 그것도 겨우 하루 만에. "이거 어떻게 한 건데?" 내 목소리가 좀 딱딱했을 거다. "아, 저 GPT한테 명세서 던져 주고 아키텍처 설계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틀린 부분들만 수정했거든요. 제 사실 생각은 API 응답 구조 부분인데, 그건 당신이 더 잘 아실 것 같아서..." 그 말을 끝끝내지 못했다. 내가 끊어 버렸거든. "알겠어."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4일 대 1일의 벽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계속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내가 4일이 걸린 일을 저 신입이 하루에 했다. 그 차이가 뭘까. 경험? 능력? 아니면 정보 접근? 6년 전, 내가 신입일 때는 이런 작업을 할 때 선임에게 물어보고, 책도 찾아 보고, 스택오버플로우도 뒤지고,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배웠다. 왜 이렇게 설계해야 하는지, 어떤 함정이 있는지, 언제 어떤 패턴을 쓰는지. 나는 그 모든 경험을 쌓아서 지금의 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봉도 더 받고, 더 중요한 일을 맡기고, 후배들이 내게 물어봤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김준영이가 써 주는 프롬프트만 좋으면, 더 이상 나는 필요 없는 걸까.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이거였다. 그 신입은 공부를 덜 해도 된다는 거다. 내가 6년에 걸쳐 머릿속에 집어넣은 모든 지식, 패턴, 실수들로부터의 배움. 그 모든 게 이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으로 대체된다는 뜻인가. 실제로 김준영이는 왜 그 API 구조를 그렇게 설계했는지 정확히 모를 거다. 다만 GPT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만약에 조금 다른 요구사항이 생기면? 그때도 또 ChatGPT를 물어볼 거겠지. 시간이 가면서 자기 사고력은 점점 약해질 거고.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회사 입장에선 결과만 중요하니까. 그 깨달음이 정말 끔찍했다.경험의 가치는 이미 사라졌다 화요일 아침, 나는 스택오버플로우 트래픽 30% 감소 뉴스를 다시 읽었다. 6개월 전에도 본 뉴스인데, 그때는 남 얘기처럼 들었다. 이제는 달랐다. 개발자들이 스택오버플로우에 가서 고민을 공유하고 답을 찾는 대신, 이제 그냥 ChatGPT에게 묻는다. 스택오버플로우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 가고 있는 거다. 내가 신입일 때 그렇게 소중했던 커뮤니티가 말이다. 그 이유가 뭘까. 단순히 속도가 빠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건 패러다임의 변화다. 개발이라는 게 이제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서 "AI한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 위험한 건 이거다. 너무 많은 개발자가 AI한테 설명을 잘 하려니까, 정작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는 잊어 버린다는 것. 나도 그랬다. 요즘 코딩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이거 GPT한테 시키면 되는데 왜 내가 하지?"였다. 그 생각이 점점 자동화되면서 나는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개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AI가 만든 코드를 검수하는 역할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내 생각은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이 질문이 내 전 인생을 뒤흔들어 버렸다. 기획이라는 도피처 그 질문을 품고 일주일을 더 지냈을 때, 나는 기획팀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획자들은 뭘 하나. AI가 뭘 못 하는가. 당연히 전략이다. 방향성이다. 의사결정이다. 우리 서비스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AI는 그걸 할 수 없다. 할 수 있더라도, 결국 인간이 그 결과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 기획자는 AI 시대에도 필요한 직군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게 선명해졌다. 요즘 들어서 기획 문서를 작성할 때가 제일 재밌었다. 마케팅 임원한테 설득해야 할 논리를 짜고, 사용자 시나리오를 그려 보고, 요구사항을 정의할 때.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코딩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코딩은 점점 더 '만드는 행위' 자체가 재미 없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AI가 만들어 주니까. 하지만 기획은? 기획은 아무리 AI가 발전해도, 결국 인간의 의도를 담아야 하는 영역이다. 사실 그건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기획 책 10권을 읽기 시작했다. '프로덕트 오너십', '린 제품 관리', '인터스텔라 기획'.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카페에 앉아서 기획 인강을 들었다. 회사에서 하는 기획 업무를 유심히 관찰했다. 기획자들이 뭘 놓치고 있는지, 내 개발 배경으로는 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김 팀장, 그런데 이 기능 정말 개발 가능하기는 해요? 추정 시간이..." 회의 중에 기획자가 물었을 때, 나는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발과 기획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느껴 버렸다. 아, 나는 개발자 + 기획자가 될 수 있겠다.하지만 현실은 물론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획 공고를 보면 죄다 "기획 경력 3년 이상"이다. 개발 경력 6년이 왜 되지 않지? 그건 "개발은 기획이 아니니까"라는 회사의 논리일 거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다. 기획과 개발은 완전히 다른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1차 탈락을 당했다. 그리고 2차, 3차 탈락을 당했다. 신입 기획 지원으로 가려는 시도도 있었다. 근데 신입 기획 공고는 정말 드물다. 대부분의 회사는 기획자는 경험자를 원한다. 개발자는 신입을 뽑으면서 말이다. 그게 참 아이러니다. 코딩 스킬은 배워도 되는데, 기획 마인드는 못 배운다고 생각하나 봐. 아니, 사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다. 개발자는 교육으로 키울 수 있지만 기획자는... 음. 아내가 옆에서 말했다. "그래도 해 봐. 네 개발 경험이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그 말은 맞지만, 그 말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이다. 기획 포지션을 노리는 개발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개발과 기획을 다 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 되기보다는 "어디 속할지 모르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6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여전히 개발자였다. 매일 코딩했다. 하지만 마음은 기획에 가 있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집중력이 떨어졌고, 코드 리뷰 때도 조금씩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배들이 알아챘을 거다. 아, 이 팀장은 이제 개발에 흥미가 없다는 걸. 그리고 그게 또 다른 불안을 낳았다. 개발도 못 하고 기획도 못 하는 놈이 되는 거 아닐까. 진정한 의미의 "어정쩡한 개발자". 그럼 내가 정말 필요한 건 뭘까 김준영이의 하루가 내 4일을 이겨 낸 이후로, 내가 내린 수많은 결론들이 있다. 첫째, 개발자로서의 내 가치는 이미 정점을 지났다. 아니, 이미 하강중이다. AI가 빨라진 이상 경험으로는 못 이긴다는 걸 알았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기획이 만능은 아니다. 기획도 언젠가 AI한테 대체되겠지. 다만 그건 10년은 더 걸릴 거 같다. 셋째, 진짜 필요한 건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왜 만들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건 순수한 기획만으로도, 순수한 개발만으로도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기획으로 전환하는 게 아니라, 개발자가 기획을 이해하는 개발자가 되는 것이다. 기획자가 개발자를 이해하는 기획자가 되는 것처럼. 근데 그게 가능할까. 내 회사에서는 지금까지 그런 사람을 본 적 없다. 대부분은 한 직군 안에서 깊게 파거나, 크로스펑셔널로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정착지를 못 찾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금요일 오후, 나는 퇴사를 생각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 신혼이고, 연봉도 6200만원인데 기획으로 가면 4000만원대가 될 게 분명했다. 그 차이를 어떻게 감수할까.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다시 생각해 본다. 5년 뒤, 정말로 주니어 개발자는 필요 없을까. 혹은 나는 필요 없을까. 개발과 기획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특별한 가치가 있을 순 없을까. 아무도 정확한 답을 줄 수 없다. 어쨌든 내일은 출근한다 월요일 오전 10시, 나는 또 기획팀에서 온 명세서를 들고 개발팀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실시간 알림 시스템이었다. 복잡한 아키텍처가 필요할 거 같은 작업이다. 김준영이가 물었다. "팀장님, 이거 저도 한 번 해 볼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 봐. 그리고 어떻게 했는지 내한테 설명해 줘." "네, 알겠습니다." 그 신입의 어깨가 펴지는 게 보였다. 한 번 더 그럴 기회를 준 팀장에 대한 고마움일 거다. 그리고 나는 다시 기획팀 쪽을 봤다. 기획자들이 회의 중이었다. 작은 화면에 와이어프레임이 떴다. 그들이 뭘 논의하고 있는지 귀가 쏠렸다. 결국 이 조직이 만드는 모든 걸 시작하는 곳은 저거다. 코드가 아니라, 질문이다. 왜? 무엇을? 누구를 위해?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나는 또 뭘 해야 할까.내일은 퇴근 후 기획 인강을 한 강 더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