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 대신 기획을 선택했을 때 얻는 것과 잃는 것
- 28 Dec, 2025
엑셀 시트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 기획자가 공유한 로드맵 엑셀을 봤다. Q1, Q2, Q3로 나뉜 제품 일정. 각 기능의 우선순위. 예상 매출 영향도.
“이거 재밌겠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6년간 코드만 짰는데, 저런 시야로 일하면 어떨까.
그리고 바로 다음 생각. “근데 나 알고리즘 다 까먹겠네.”

잃는 것: 기술적 깊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획으로 가면 코딩 실력은 녹슬 것이다.
지금도 GPT 쓰면서 느낀다. 3개월 전엔 손으로 짰던 걸 지금은 프롬프트로 시킨다. 알고리즘 문제? 작년에 마지막으로 풀었다.
기획으로 가면 더 심해질 것이다. SQL 정도는 쓰겠지만, 새로운 프레임워크 공부는 안 할 것이다. 기술 블로그 읽는 시간에 시장 리포트를 읽을 것이다.
동기가 스타트업 CTO 됐다는 소식 들었다. 부럽긴 했다. 기술 리더로 가는 길. 나는 그 길을 포기하는 거다.
“야, 넌 아직 FastAPI 신규 기능 다 알잖아.”
팀장이 그랬다. 맞다. 아직은 안다.
근데 3년 뒤엔 모를 것이다.
기술 커뮤니티에서도 멀어질 것이다. 개발자 밋업 가면 뭔가 어색할 것이다. “나 이제 기획 쪽이야” 말하면 묘한 공기가 흐른다. 동료에서 외부인이 되는 느낌.
깊이를 잃는다. 전문성을 잃는다.
대신 뭘 얻는데?
얻는 것: 사업의 시야
어제 대표님과 회의했다. 신규 기능 개발 건.
“이거 왜 만드는 거예요?” “사용자 요청이 많아서요.” “근데 매출은 어떻게 늘어나는데요?”
대표님이 딱 그 표정 지으셨다. ‘이 친구 다르네’ 하는 표정.
기획자는 이런 질문을 매일 한다. Why를 묻는다. 사용자는 왜 이걸 원하나. 경쟁사는 왜 저렇게 했나. 우리는 왜 이길 수 있나.
개발자는 How를 푼다. 어떻게 만드나. 어떻게 최적화하나.
두 개는 완전히 다른 근육이다.

PM 하는 친구가 말했다.
“넌 개발 6년 했으니까 유리해. 기술 한계 알잖아. 무리한 요구 안 해. 개발팀이 널 신뢰할 거야.”
맞는 말이다. 순수 기획 출신은 가끔 황당한 요청을 한다. “이거 하루면 되죠?” 2주 걸리는 걸.
나는 그런 실수 안 할 것이다. 기술 부채 쌓이는 거 알고, 리팩토링 시간 필요한 거 알고, DB 마이그레이션 리스크 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제품 전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지라 티켓을 받는다. “로그인 API 성능 개선.” 이게 전체 서비스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모른다. 그냥 한다.
기획은 다르다. 이 기능이 MAU를 얼마나 늘릴지 계산한다. 이탈률을 몇 %p 줄일지 예측한다. 3개월 뒤 OKR과 연결한다.
숲을 본다. 나무가 아니라.
돈 계산을 해봤다
현실적으로 따져봤다. 연봉.
지금: 6200만원. 개발 6년차 평균. 기획 전환 직후: 4500만원? 기획 신입 수준. 5년 뒤 개발자: 7500만원? (AI 영향 고려하면 불확실) 5년 뒤 PM: 8500만원? (시니어 PM, 프로덕트 오너)
계산이 맞나? 모른다. 변수가 너무 많다.
확실한 건, 단기적으론 손해다. 1700만원 줄어든다. 월 140만원. 적지 않다.
아내한테 말했다.
“연봉 깎여도 괜찮아?” “5년 뒤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 5년 뒤를 봐야 한다.
근데 5년 뒤에 PM도 AI한테 대체되면? 그건 생각 안 하기로 했다. 그럼 답이 없다.

정체성이 흔들린다
가장 어려운 건 이거다.
나는 6년간 “개발자”였다. 명함에도 그렇게 썼고, 자기소개할 때도 그랬다.
“개발 뭐 해요?” “백엔드요, 파이썬.”
이제 뭐라고 해야 하나.
“기획 쪽으로 전환했어요.” “아, 개발이 힘들어서요?”
아니, 힘들어서가 아니라… 설명하기 귀찮다.
주변 개발자들 반응도 묘하다.
“야, 기획 가면 편하겠다. 코딩 안 해도 되잖아.”
편해서 가는 게 아닌데. 다른 어려움이 있는데. 말해봐야 이해 못 한다.
부모님은 더 모르신다.
“개발자가 좋은 거 아니야? 연봉도 높고.” “요즘 AI가 대체한다니까요.” “뭐? AI가 일을 해?”
설명 포기했다.
스스로도 헷갈린다. 나는 개발을 싫어하나? 아니다. 싫지 않다. 그냥 AI가 더 잘할 뿐이다.
기획을 좋아하나? 모른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상상으로만 좋아한다.
이게 맞는 선택인가? 모른다.
3년 뒤에 알 것이다.
기술 vs 사업, 양립은 불가능한가
가끔 생각한다. 둘 다 할 수는 없나.
테크 PM. 기술 이해도 높고 사업 감각도 있는.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지금 회사 PM 중에 개발 출신이 한 명 있다. 3년 차. 코드는 이제 안 짠다. SQL만 가끔. 기술 회의 때 의견은 내지만, 디테일은 모른다.
“예전엔 다 알았는데, 이젠 감만 있어.”
그가 말했다. 솔직한 말이었다.
결국 Trade-off다. 깊이를 버리고 넓이를 얻는다.
개발자는 1미터를 10미터 깊이로 판다. 기획자는 10미터를 1미터 깊이로 판다.
둘 다 10미터 깊이로? 불가능하다. 24시간은 모두에게 똑같다.
10년 뒤를 상상해봤다
2034년.
시나리오 1: 개발자로 남았다. AI가 코드 90%를 짠다. 나는 검수하고 아키텍처를 짠다. 시니어 역할. 연봉은 비슷하거나 소폭 하락. 수요는 줄었지만 시니어는 필요하다. 안정적이지만 성장 정체.
시나리오 2: 기획으로 전환했다. 프로덕트 오너가 됐다. 팀을 이끈다. 사업 전략을 짠다. AI 도구를 활용하지만 방향은 내가 정한다. 연봉은 상승. 불확실하지만 가능성 있다.
시나리오 3: 둘 다 망했다. AI가 모든 걸 대체했다. 개발도 기획도 필요 없다.
세 번째는 생각 안 하기로 했다. 그럼 뭘 해도 의미 없다.
현실적으로 1번과 2번 중 선택이다.
1번은 안전하다. 익숙하다. 검증됐다. 2번은 도전이다. 불확실하다. 더 재밌을 수도.
난 2번을 선택하려 한다.
왜냐면, 이미 1번의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 기획 문서를 하나 썼다
퇴근 후 집에서 2시간 동안 기획안을 작성했다. 회사 신규 기능 제안서.
문제 정의, 타겟 사용자, 기대 효과, 개발 공수, 우선순위 근거.
완성하고 나니 뿌듯했다. 코드 짤 때와는 다른 만족감.
‘이게 실제로 만들어지면, 사용자가 쓰면, 매출이 늘면.’
상상만으로도 재밌었다.
내일 팀장한테 보여줄까 말까 고민 중이다.
“야, 넌 개발자잖아. 왜 이런 거 써?”
그럴 수도 있다.
근데 언젠간 말해야 한다. 기획으로 가고 싶다고.
연봉 깎이는 건 감수한다. 정체성 혼란도 견딘다. 기술 깊이 잃는 것도 받아들인다.
대신 얻고 싶다.
제품 전체를 보는 시야. 사업의 흐름을 읽는 감각. 사용자의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그게 앞으로 10년, 더 가치 있을 거라 믿는다.
틀릴 수도 있다. 3년 뒤 후회할 수도 있다.
근데 지금 이 자리에 그냥 있다간, 확실히 후회할 것 같다.
내일 팀장한테 커피 한잔 하자고 할까. 진지하게 얘기 좀 하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