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때 기획자를 보면서 '저거 나도 할 수 있겠는데' 생각한 횟수
- 02 Dec, 2025
회의실에서 깨달은 것들
출근했다. 월요일 아침 10시. 데일리 회의.
개발팀이 만든 신규 기능에 대해 기획팀이 설명 중이었다. 로그인 플로우 개선 건이었나. 담당 기획자가 화면 흐름을 설명하는데, 첫 슬라이드에서 뭔가 이상했다. “어? 저건 사용자가 뒤로 가기를 누르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기획자가 한 박자 쉬었다. “아… 그건…” 그 다음은 개발 리드가 설명했다. 좋다. 나도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생각을 처음 한 건 3개월 전이었나. 지금은 거의 매 회의다.

숫자로 세어본 것
지난주 회의만 해도 5번이었다. 5번.
월요일 스프린트 계획 회의에선 “이 기능 순서 이상한데요” 했고, 수요일 사용자 테스트 결과 리뷰에선 로그 분석으로 기획자 가설이 틀렸다는 걸 지적했다. 목요일 신입 기획자가 발표한 온보딩 플로우는 5초 만에 3개 버그를 찾았다. 사용자 관점으로 생각하면 명백했다. 첫 화면에서 필수 정보 입력을 했는데 다시 돌아오면 초기화된다? 나쁜 UX다.
그때마다 나는 발언했다. 자연스럽게. “저기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요”, “사용자 입장에선 이게 혼란스럽지 않을까요”, “데이터로 봤을 때 이 가설은 검증이 필요해 보여요”. 매번 리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생각했다. 나 지금 기획하고 있는 거 아니야?
지난달부터 슬랙에서 자발적으로 프로젝트 기획 문서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어떨까요?” 형식으로. 팀장이 대게 좋아했다. 나는 개발자인데 기획 문서를 쓰고, 그걸 읽고 받아들이는 것. 경계가 흐릿해졌다.
명확히는 이랬다. 코딩과 기획은 다른 근육인데, 요즘 난 기획 근육을 쓸 때가 더 재밌다는 거다.
세 가지 신호
신호 1: 로직 오류를 찾고 있다
회의 중에 발표되는 기능 플로우를 보면, 내 뇌는 자동으로 엣지 케이스를 찾는다. 사용자가 이걸 누르면? 인터넷이 끊기면? 중복 클릭하면? 뒤로 가기 버튼이라도 눌리면?
개발자로서 6년간 길들여진 습관이다. 모든 시나리오를 대비하는. 그런데 회의실에서 이걸 꺼내면, 기획자들이 못 본 구멍이 보인다. 그리고 그걸 지적할 때 뭔가 쾌감이 있다. 코드 리뷰할 때는 있는 쾌감. 근데 좀 다르다. 사람들이 내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다.
코드는 잘 작동하는 게 중요하다. 기획은 논리가 일관되는 게 중요하다. 둘 다 좋지만, 후자가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하는 느낌이다.
신호 2: 사용자 흐름을 먼저 본다
기획 발표 자료를 보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UI 플로우다. 누가 어떻게 이 기능을 쓸 텐데, 그 사람이 느낄 경험이 좋을까? 라는 질문.
예전엔 이런 생각을 안 했다. 개발자일 때는 “이 로직이 구현 가능한가”가 먼저였다. 지금은 “이 흐름이 자연스러운가”가 먼저다.
와이어프레임을 보면서 “여기 한 스텝 더 줄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한다. 피그마를 열어서 내가 직접 고쳐본다. 그리고 슬랙에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라고 보낸다. 기획자 둘 다 좋다고 한다.
난 그걸 할 때 재밌다. 코드 짤 때보다 훨씬.
신호 3: 기획 이직공고를 본다
요즘 하루 종일 일을 하는데, 틈날 때마다 PM 이직 사이트를 본다. 연봉은? 요구 자격은? “기획 경력 3년 이상 또는 유사 경험”. 여기서 뜨한다. 나는 유사 경험이 있나? 기술 회사에서 6년간 개발했다. 제품을 안다. 사용자 데이터도 본다. 스프린트 계획도 참여한다. 개발 팀장이 내 기획 문서를 “거의 PM 수준”이라고 했다.
그럼 될 거 아닐까?
서류를 넣어봤다. 4개 회사. 모두 탈락. 이유는 “보직 경험 부족”. 신입처럼 봤다는 뜻이다.
그럼 내부에서 전환할까? 팀장한테 “제가 기획 역할 좀 더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봤다. “그럼 개발은?”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나요?” “음… 일단 현직무를 잘 하고.”
그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아, 나 이 회사에선 절대 기획으로 안 가겠네.

회의실에서 5번 본 것들
발표 1: 온보딩 플로우 (목요일)
신입 기획자가 만든 건데, 첫 화면은 휴대폰 번호 입력이었다. 그 다음이 인증 코드. 그 다음이 이름, 이메일, 나이, 직업. 매 화면마다 “다음” 버튼. 8 스텝. 8번 터치.
내가 손을 들었다. “혹시 한 화면에 관련 정보를 모아서 하면 안 될까요?” 기획자가 “그런데 모바일 화면은…” 했고, 난 노션을 켜서 와이어프레임을 그렸다. 휴대폰 인증 후 한 화면에 필수 정보 4개를 폼으로. 다음. 끝. 2 스텝.
회의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좋다고 했다. 기획자가 “아,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화이팅을 받았다.
그 느낌. 코드 리뷰에서는 거의 못 본 느낌. 누군가 내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걸로 무언가 더 나아진다는 느낌.
발표 2: 결제 플로우 (수요일)
기획팀이 신규 결제 방식을 설명했다. 사용자가 카드 등록 → 결제 진행 → 결과 확인. 좋아 보였다. 근데 뭔가 빠진 느낌이었다.
“혹시 결제 실패 케이스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사용자가 재시도하려면?” 기획자가 “아… 그건 개발팀이…” 했고, 난 “아니면 이렇게는 어떨까요?” 했다. 실패 화면에 “다시 시도” 버튼과 “다른 카드 등록” 옵션. 그리고 에러 메시지는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개발 리드가 “그게 훨씬 낫네”라고 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 지금 개발자로서 기획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기획자로서 플로우를 검토하고 있다.
발표 3: 추천 알고리즘 (월요일)
데이터 팀이 만든 추천 엔진을 기획팀이 발표했다. “사용자가 본 상품 기반으로 유사 상품을 추천합니다.”
좋지만, 문제가 있었다. 추천 상품이 노출될 화면이 없었다. 기획 단계에서 “어디에 띄울 건데?”를 못 정한 거다. 나는 “상품 상세 페이지 하단에 ‘비슷한 상품’ 섹션 어떨까요? 아니면 장바구니 페이지?” 했다.
기획자가 후자를 택했다. 사용자 입장에선 더 자연스럽다고. 내가 제안한 UI 패턴을 기획자가 채택했다.
이걸 할 때 기분이 좋다. 코드 리뷰보다.
발표 4, 5: 기타 등등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기획 문서를 보고 “여기 문제다”, “여기 개선할 수 있다”, “사용자가 이렇게 쓸 텐데”라고 말한다. 대부분 받아들여진다. 리더도, 기획팀도, 개발팀도.
그리고 매번 내 뇌는 같은 신호를 보낸다. “야 한기획, 넌 이게 더 재밌구나.”

AI가 제일 먼저 닿은 부분
재밌는 건 이거다. AI가 코딩은 잘하는데, 기획은 못한다는 거. 아직.
GPT한테 “버그 고치는 코드 짜줘”라고 하면 60초 안에 나온다. 근데 “사용자가 헷갈릴 온보딩 플로우를 만들어줘”라고 하면? GPT가 “일반적인 온보딩은…” 하면서 대충한다. 개성이 없다. 데이터를 봐야 한다. 사용자를 봐야 한다. 우리 회사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
그건 AI가 못한다. 아직.
그래서 요즘 생각이 이거다. 개발자는 5년 뒤 위험하다. AI가 너무 잘한다. 기획자도 10년 뒤 위험할 수도. 근데 지금 전환하면? 기획은 좀 더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다.
사이드로 프로젝트 하나를 온전히 기획해봤다. “개발자를 위한 작은 도구”를 만들 거면, 어떤 기능이 필요할까? 어떤 순서로 만들까? 누가 쓸까? 왜 쓸까?
그걸 문서로 정리하는 데 3일이 걸렸다. 코딩은 1주일 걸렸다. 그런데 재밌은 건, 기획할 때가 더 오래 집중했다는 거다. 뇌가 다르게 돌아갔다.
현실은 이렇고
좋은 생각들만 있는 건 아니다.
첫째, 연봉이다. 기획 신입으로 시작하면 4500~5200만원 대. 지금 6200만원에서 1000만원을 버린다. 아내는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지만, 숫자를 보면 다르다.
둘째, 경력이 없다. 아무리 회의에서 기획을 해봐도, 공식 경력은 0년이다. 서류도 떨어진다. 면접도 못 본다. 신입 취급.
셋째, 버릴 거다. 6년을 쌓은 개발 경험. 팀에서의 신뢰. “이건 한기획이 하면 잘하겠는데” 이런 이미지. 전환하면 0에서 다시다.
넷째, 까일 거다. 개발자 친구들은 “왜 그래?”라고 할 거고, 기획팀은 “개발자 주제에 뭐하냐”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회사에서 개발에서 기획으로 간 사람이 “처음엔 개발팀에서 왕따였다”고 했다.
다섯째, 실패할 수도 있다. 기획이 내 성향에 안 맞을 수도 있다. 회의에서 본 것만 좋았고, 실제 일은 다를 수도. 연봉 깎이고, 경력도 없고, 실패하면? 다시 개발로? 그럼 늦는다.
그럼 이대로 개발자로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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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숫자들
지난주 회의에서 기획을 건넸던 횟수: 7번. 서류 탈락한 PM 지원: 4곳. 내부 전환 제안했을 때 답변: “현직무부터”. 코딩 경력: 6년. 기획 경력: 0년 3개월(비공식). 차이나는 연봉: 1000만원~1500만원. 회의에서 기획 발표할 때의 쾌감 점수(10점 만점): 8. 코드 리뷰할 때의 쾌감 점수: 5. AI가 내 기획을 대체할 확률(10년 뒤): 40%. AI가 내 코딩을 대체할 확률(5년 뒤): 80%.
숫자로는 답이 안 나온다.
내일의 회의
내일 회의는 신규 피처 기획 리뷰다. 나는 또 다시 앉을 거고, 또 다시 발표를 볼 거고, 또 다시 “저거 틀렸는데”라고 생각할 거다. 그리고 또 다시 손을 들거나, 슬랙에 의견을 올릴 거다.
그리고 또 다시 같은 생각을 할 거다.
“나 이거 해야 하나?”
그건 “나 이거 할 수 있나?”가 아니다. “나 이거 해야 하나?”다. 다르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일은 다르다. 근데 최근 몇 달을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쪽에 있는 것 같다.
그럼 언제 점프를 할까?
커피를 마셨다. 네 번째다.
회의실에서 “저거 내가 할 수 있겠는데”는 신호였고, 지금 그 신호가 패턴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