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로직이 틀렸을 때, 지적해야 할까 침묵해야 할까

기획자의 로직이 틀렸을 때, 지적해야 할까 침묵해야 할까

회의실에서

오늘 오전 기획 리뷰. 신규 기능 발표였다.

PM이 화면 공유했다. 사용자 플로우 설명 시작. 1단계, 2단계까지는 괜찮았다. 3단계 가니까 이상했다.

“여기서 사용자가 결제하면, 포인트 차감 후 쿠폰이 발급됩니다.”

잠깐. 순서가 반대 아닌가.

쿠폰 먼저 발급하고 결제해야 쿠폰 할인이 적용되는 거 아냐? 결제 후 쿠폰 발급하면 다음 주문에서나 쓰는 건데. 이거 사용자가 원하는 플로우가 아닌 것 같은데.

손이 올라가려다 멈췄다.

말해야 하나.

6초의 계산

머릿속이 빨리 돌아갔다.

말하면: 회의 중단, 기획자 당황, 다들 나 쳐다봄, ‘역시 개발자 출신은 까다로워’ 소리 들음, 튀어 보임, 기획팀에서 ‘저 사람 또…’ 생각함.

안 말하면: 개발 들어가서 어차피 발견됨, 일정 밀림, 기획 수정, 재검토, 시간 낭비, 근데 내 책임은 아님, 나중에 말해도 되지.

말하면 도움이 되는 건 맞다. 지금 고치면 30분, 나중 고치면 3일.

근데 튀고 싶진 않다. 나 PM 전환 준비 중인데 기획팀이랑 사이 나빠지면 안 되잖아.

발표는 계속됐다. 4단계, 5단계. 아무도 안 물어봤다. 다들 노트북만 봤다.

과거의 나

1년 전엔 바로 말했다.

“저기요, 그 부분 로직이…”

그때는 개발자였으니까. 개발자가 로직 지적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PM도 “아 맞네요, 수정하겠습니다” 했다. 별일 아니었다.

근데 지금은 다르다. 나 기획 전환 준비 중이라는 거 몇 명이 안다. 이 상황에서 기획 로직 지적하면 ‘자기가 더 잘한다는 거냐’ 이렇게 들릴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달에 한 번 있었다.

다른 PM이 API 스펙 설명할 때. 파라미터 순서가 이상했다. 말했다. 친절하게. “이 순서보다는 이렇게 하면 더 효율적일 것 같아요.”

그 PM이 “아 네… 검토해볼게요” 했는데 표정이 안 좋았다.

나중에 동료가 말해줬다. “너 요즘 기획에 관심 많다더니 진짜 그러네.”

뭔가 미묘했다. 칭찬은 아니었다.

개발자 출신의 저주

개발 6년 하면 생기는 것.

로직 오류 발견 능력. 자동으로 작동한다. 끌 수가 없다.

기획서 보면 머릿속에서 코드가 돌아간다. 이 플로우면 이 함수 호출되고, 저 조건이면 저 분기 타고. 그러다 보면 보인다. ‘어? 이거 엣지 케이스 처리 안 됐네.’

저주인 이유는 이거다. 남들은 안 보이는데 나만 보인다.

디자이너는 UI만 본다. 마케터는 전환율만 본다. 기획자는… 뭘 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로직은 깊게 안 본다.

개발자만 본다. 데이터 흐름, 예외 처리, 동시성 문제.

회의 때마다 보인다. 그럼 말해야 할 것 같다. 안 말하면 나중에 개발자가 고생한다. 근데 말하면 ‘저 사람 왜 저래’ 된다.

침묵의 대가

결국 안 말했다. 회의 끝났다.

다음 주 개발 시작됐다. 담당은 주니어였다. 이틀 지나니까 슬랙 왔다.

“한기획님, 이 플로우대로 하면 쿠폰 할인이 적용이 안 되는데 맞나요?”

알았다. 어차피 발견되는 거였다.

PM한테 물어봤다. PM이 당황했다. “어? 제가 잘못 썼나…” 기획서 다시 봤다. 30분 후 수정본 왔다.

일정은 하루 밀렸다. 주니어가 이미 반대로 짜놨거든.

점심시간에 그 PM 만났다. “아 제가 실수했네요, 죄송해요.” 했다.

미안했다. 회의 때 말할 걸.

근데 말했으면? 그 자리에서 PM 창피했을 거다. 10명 앞에서. 그것보다 나은가? 잘 모르겠다.

정답은 없다

이런 상황 한 달에 3번은 된다.

기획 로직 오류. 명백하다. 개발자 눈에는.

말하는 게 맞다. 팀을 위해. 효율을 위해. 근데 정치적으로는 복잡하다.

특히 나처럼 기획 전환 준비하는 사람은 더 복잡하다. 지적하면 ‘개발자 마인드를 못 버렸네’ 소리 듣는다. 안 하면 ‘왜 보고도 안 말했어’ 된다.

선배 PM한테 물어봤다. 개발자 출신이었다.

“나도 그랬어. 초반엔 입 닫았지. 튀기 싫어서. 근데 결국 말하게 되더라. 안 하면 나중에 더 힘들어.”

“그럼 어떻게 말해요?”

“회의 중에 안 해. 1:1로 해. ‘제가 개발하다 보니까 이런 부분이 궁금한데요’ 이렇게. 지적 아니라 질문으로.”

아. 그 방법.

질문의 기술

다음 회의 때 시도했다.

또 로직 이상한 부분 나왔다. 손 안 들었다. 메모만 했다.

회의 끝나고 슬랙 DM 보냈다.

“OO님, 아까 3단계 부분 제가 이해가 잘 안 가서 여쭤보는데요. 사용자가 A 액션 후 B로 가면 C 데이터는 어떻게 전달되나요? 개발하려면 이 부분 명확해야 할 것 같아서요.”

10분 후 답장 왔다.

“아 그 부분이요? 음… C 데이터는…” 타이핑 멈췄다. 3분 후. “어? 제가 빠뜨린 부분이 있네요. 수정해서 다시 공유할게요!”

완벽했다. PM 기분 안 나쁘고, 문제 해결됐고, 나도 튀지 않았다.

질문. 지적 아니라 질문.

“제가 이해가 안 가서요” 이 한 마디가 마법이었다.

타이밍의 문제

언제 말하느냐도 중요하다.

회의 중 vs 회의 후. 공개 vs 비공개.

회의 중 말하면 효율적이다. 다들 듣고 바로 공유된다. 근데 PM 입장에선 부담이다.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회의 후 말하면 시간은 좀 걸린다. 근데 PM이 조용히 수정할 수 있다. 체면 지킬 수 있다.

어느 게 나을까.

정답은 ‘관계’다. PM이랑 친하면 회의 중에 해도 된다. “어? 그 부분 이거 아니야?” 농담처럼. PM도 “아 맞다!” 하고 넘어간다.

안 친하면 조용히 해야 한다. 1:1로.

나는 지금 기획팀이랑 관계 쌓는 중이다. 아직 친하지 않다. 그러니까 조용히 한다.

6개월 후엔? PM 되면? 그땐 회의 중에도 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나도 로직 틀릴 텐데.

틀릴 권리

기획자도 틀릴 권리 있다.

개발자도 버그 만든다. 디자이너도 UI 수정한다. 마케터도 캠페인 실패한다.

기획자도 로직 틀릴 수 있다. 당연하다.

문제는 ‘개발자 출신’이 지적하면 다르게 들린다는 거다.

같은 말을 다른 PM이 하면 “아 맞네요!” 인데, 개발자가 하면 “저 사람 또 따지네” 된다.

불공평하다. 근데 현실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개발자는 ‘로직’을 무기로 삼는다. 논리적으로 맞다/틀리다를 명확히 가른다. 이게 기획자 입장에선 부담이다. “틀렸다”는 말이 “능력 없다”로 들린다.

실제로는 아닌데. 그냥 로직 오류일 뿐인데. 감정이 섞인다.

PM 전환을 앞둔 나

요즘 계속 생각한다.

내가 PM 되면 개발자가 내 로직 지적할 거다. 당연하다. 나도 틀릴 테니까.

그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아 맞네요, 수정할게요” 편하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기획 경력 짧다고 무시하나’ 이렇게 될까.

지금 내가 다른 PM한테 하는 짓이 나한테 돌아올 거다. 카르마다.

그래서 요즘은 더 조심한다. 말투, 타이밍, 표현. 질문 형식으로, 비공개로, 부드럽게.

나도 곧 지적받을 입장이니까.

실수할 권리, 배울 권리, 성장할 권리. 기획자한테도 있다. 개발자 출신이라고 다 아는 척하면 안 된다.

근데 또 명백한 오류를 보고 침묵하는 것도 이상하다. 팀워크가 아니다.

균형이 필요하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계속 찾는 중이다.

어제의 선택

어제 또 있었다.

신규 기능 기획. 사용자 권한 처리 부분이 이상했다.

“관리자가 수정 권한을 주면, 일반 유저도 모든 데이터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모든 데이터’가 문제였다. 다른 사람 데이터까지 수정 가능하면 보안 이슈다. 아마 ‘본인 데이터만’이 빠진 것 같았다.

회의 중엔 안 말했다. 끝나고 슬랙 보냈다.

“OO님, 권한 부분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모든 데이터’가 다른 유저 데이터도 포함인가요? 아니면 본인 데이터만인가요? 개발 전에 확인하고 싶어서요.”

5분 후 답장.

“아! 본인 데이터만이요. 문서에 추가할게요. 잘 봐주셨네요!”

기분 좋았다. PM도, 나도.

이게 답인 것 같다. 지금은.

6개월 후의 나

기획 전환하면 달라질까.

개발자일 때랑 PM일 때.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들릴 거다.

지금은 ‘개발자가 또 로직 따진다’인데, PM 되면 ‘기획자끼리 의견 나눈다’가 된다.

이상하다. 같은 내용인데.

근데 그게 조직이다. 직책이 대화를 바꾼다.

나는 어떤 PM이 될까.

개발자 의견 잘 듣는 PM? 아니면 ‘내가 더 잘 안다’는 PM?

후자는 되기 싫다. 절대로.

나도 개발자였다. 개발자가 로직 얘기할 때 이유가 있다. 귀찮아서 하는 게 아니다. 문제가 보여서다.

그걸 무시하는 PM. 최악이다.

나는 안 그럴 거다. 개발자 출신 PM의 장점이 뭔데. 개발자 말 이해하는 거잖아.

오늘의 결론

기획 로직 틀렸을 때. 말해야 한다. 근데 방법이 있다.

회의 중 X, 회의 후 O. 지적 X, 질문 O. 공개 X, 비공개 O.

“이거 틀렸는데요” 대신 “이 부분 궁금한데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요” 대신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로직 오류입니다” 대신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같은 내용, 다른 포장.

유치하다고? 아니다. 이게 어른이다. 조직생활이다.

정확함만 중요한 게 아니다. 관계도 중요하다. 둘 다 지키는 게 진짜 능력이다.

나는 배우는 중이다. 개발자에서 PM으로. 로직에서 사람으로.

아직 서툴다. 실수한다. 어제도 회의 중에 바로 말해버렸다. PM 표정이 굳었다. 또 실패했다.

근데 괜찮다. 계속 배우면 된다.

6개월 후 나는 지금보다 나을 거다. 1년 후엔 더 나을 거다.


말하되, 상처 주지 않게. 지적하되, 함께 성장하게. 그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