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로직이 틀렸을 때, 지적해야 할까 침묵해야 할까
- 21 Dec, 2025
회의실에서
오늘 오전 기획 리뷰. 신규 기능 발표였다.
PM이 화면 공유했다. 사용자 플로우 설명 시작. 1단계, 2단계까지는 괜찮았다. 3단계 가니까 이상했다.
“여기서 사용자가 결제하면, 포인트 차감 후 쿠폰이 발급됩니다.”
잠깐. 순서가 반대 아닌가.
쿠폰 먼저 발급하고 결제해야 쿠폰 할인이 적용되는 거 아냐? 결제 후 쿠폰 발급하면 다음 주문에서나 쓰는 건데. 이거 사용자가 원하는 플로우가 아닌 것 같은데.
손이 올라가려다 멈췄다.
말해야 하나.

6초의 계산
머릿속이 빨리 돌아갔다.
말하면: 회의 중단, 기획자 당황, 다들 나 쳐다봄, ‘역시 개발자 출신은 까다로워’ 소리 들음, 튀어 보임, 기획팀에서 ‘저 사람 또…’ 생각함.
안 말하면: 개발 들어가서 어차피 발견됨, 일정 밀림, 기획 수정, 재검토, 시간 낭비, 근데 내 책임은 아님, 나중에 말해도 되지.
말하면 도움이 되는 건 맞다. 지금 고치면 30분, 나중 고치면 3일.
근데 튀고 싶진 않다. 나 PM 전환 준비 중인데 기획팀이랑 사이 나빠지면 안 되잖아.
발표는 계속됐다. 4단계, 5단계. 아무도 안 물어봤다. 다들 노트북만 봤다.

과거의 나
1년 전엔 바로 말했다.
“저기요, 그 부분 로직이…”
그때는 개발자였으니까. 개발자가 로직 지적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PM도 “아 맞네요, 수정하겠습니다” 했다. 별일 아니었다.
근데 지금은 다르다. 나 기획 전환 준비 중이라는 거 몇 명이 안다. 이 상황에서 기획 로직 지적하면 ‘자기가 더 잘한다는 거냐’ 이렇게 들릴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달에 한 번 있었다.
다른 PM이 API 스펙 설명할 때. 파라미터 순서가 이상했다. 말했다. 친절하게. “이 순서보다는 이렇게 하면 더 효율적일 것 같아요.”
그 PM이 “아 네… 검토해볼게요” 했는데 표정이 안 좋았다.
나중에 동료가 말해줬다. “너 요즘 기획에 관심 많다더니 진짜 그러네.”
뭔가 미묘했다. 칭찬은 아니었다.
개발자 출신의 저주
개발 6년 하면 생기는 것.
로직 오류 발견 능력. 자동으로 작동한다. 끌 수가 없다.
기획서 보면 머릿속에서 코드가 돌아간다. 이 플로우면 이 함수 호출되고, 저 조건이면 저 분기 타고. 그러다 보면 보인다. ‘어? 이거 엣지 케이스 처리 안 됐네.’
저주인 이유는 이거다. 남들은 안 보이는데 나만 보인다.
디자이너는 UI만 본다. 마케터는 전환율만 본다. 기획자는… 뭘 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로직은 깊게 안 본다.
개발자만 본다. 데이터 흐름, 예외 처리, 동시성 문제.
회의 때마다 보인다. 그럼 말해야 할 것 같다. 안 말하면 나중에 개발자가 고생한다. 근데 말하면 ‘저 사람 왜 저래’ 된다.

침묵의 대가
결국 안 말했다. 회의 끝났다.
다음 주 개발 시작됐다. 담당은 주니어였다. 이틀 지나니까 슬랙 왔다.
“한기획님, 이 플로우대로 하면 쿠폰 할인이 적용이 안 되는데 맞나요?”
알았다. 어차피 발견되는 거였다.
PM한테 물어봤다. PM이 당황했다. “어? 제가 잘못 썼나…” 기획서 다시 봤다. 30분 후 수정본 왔다.
일정은 하루 밀렸다. 주니어가 이미 반대로 짜놨거든.
점심시간에 그 PM 만났다. “아 제가 실수했네요, 죄송해요.” 했다.
미안했다. 회의 때 말할 걸.
근데 말했으면? 그 자리에서 PM 창피했을 거다. 10명 앞에서. 그것보다 나은가? 잘 모르겠다.
정답은 없다
이런 상황 한 달에 3번은 된다.
기획 로직 오류. 명백하다. 개발자 눈에는.
말하는 게 맞다. 팀을 위해. 효율을 위해. 근데 정치적으로는 복잡하다.
특히 나처럼 기획 전환 준비하는 사람은 더 복잡하다. 지적하면 ‘개발자 마인드를 못 버렸네’ 소리 듣는다. 안 하면 ‘왜 보고도 안 말했어’ 된다.
선배 PM한테 물어봤다. 개발자 출신이었다.
“나도 그랬어. 초반엔 입 닫았지. 튀기 싫어서. 근데 결국 말하게 되더라. 안 하면 나중에 더 힘들어.”
“그럼 어떻게 말해요?”
“회의 중에 안 해. 1:1로 해. ‘제가 개발하다 보니까 이런 부분이 궁금한데요’ 이렇게. 지적 아니라 질문으로.”
아. 그 방법.
질문의 기술
다음 회의 때 시도했다.
또 로직 이상한 부분 나왔다. 손 안 들었다. 메모만 했다.
회의 끝나고 슬랙 DM 보냈다.
“OO님, 아까 3단계 부분 제가 이해가 잘 안 가서 여쭤보는데요. 사용자가 A 액션 후 B로 가면 C 데이터는 어떻게 전달되나요? 개발하려면 이 부분 명확해야 할 것 같아서요.”
10분 후 답장 왔다.
“아 그 부분이요? 음… C 데이터는…” 타이핑 멈췄다. 3분 후. “어? 제가 빠뜨린 부분이 있네요. 수정해서 다시 공유할게요!”
완벽했다. PM 기분 안 나쁘고, 문제 해결됐고, 나도 튀지 않았다.
질문. 지적 아니라 질문.
“제가 이해가 안 가서요” 이 한 마디가 마법이었다.
타이밍의 문제
언제 말하느냐도 중요하다.
회의 중 vs 회의 후. 공개 vs 비공개.
회의 중 말하면 효율적이다. 다들 듣고 바로 공유된다. 근데 PM 입장에선 부담이다.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회의 후 말하면 시간은 좀 걸린다. 근데 PM이 조용히 수정할 수 있다. 체면 지킬 수 있다.
어느 게 나을까.
정답은 ‘관계’다. PM이랑 친하면 회의 중에 해도 된다. “어? 그 부분 이거 아니야?” 농담처럼. PM도 “아 맞다!” 하고 넘어간다.
안 친하면 조용히 해야 한다. 1:1로.
나는 지금 기획팀이랑 관계 쌓는 중이다. 아직 친하지 않다. 그러니까 조용히 한다.
6개월 후엔? PM 되면? 그땐 회의 중에도 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나도 로직 틀릴 텐데.
틀릴 권리
기획자도 틀릴 권리 있다.
개발자도 버그 만든다. 디자이너도 UI 수정한다. 마케터도 캠페인 실패한다.
기획자도 로직 틀릴 수 있다. 당연하다.
문제는 ‘개발자 출신’이 지적하면 다르게 들린다는 거다.
같은 말을 다른 PM이 하면 “아 맞네요!” 인데, 개발자가 하면 “저 사람 또 따지네” 된다.
불공평하다. 근데 현실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개발자는 ‘로직’을 무기로 삼는다. 논리적으로 맞다/틀리다를 명확히 가른다. 이게 기획자 입장에선 부담이다. “틀렸다”는 말이 “능력 없다”로 들린다.
실제로는 아닌데. 그냥 로직 오류일 뿐인데. 감정이 섞인다.
PM 전환을 앞둔 나
요즘 계속 생각한다.
내가 PM 되면 개발자가 내 로직 지적할 거다. 당연하다. 나도 틀릴 테니까.
그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아 맞네요, 수정할게요” 편하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기획 경력 짧다고 무시하나’ 이렇게 될까.
지금 내가 다른 PM한테 하는 짓이 나한테 돌아올 거다. 카르마다.
그래서 요즘은 더 조심한다. 말투, 타이밍, 표현. 질문 형식으로, 비공개로, 부드럽게.
나도 곧 지적받을 입장이니까.
실수할 권리, 배울 권리, 성장할 권리. 기획자한테도 있다. 개발자 출신이라고 다 아는 척하면 안 된다.
근데 또 명백한 오류를 보고 침묵하는 것도 이상하다. 팀워크가 아니다.
균형이 필요하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계속 찾는 중이다.
어제의 선택
어제 또 있었다.
신규 기능 기획. 사용자 권한 처리 부분이 이상했다.
“관리자가 수정 권한을 주면, 일반 유저도 모든 데이터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모든 데이터’가 문제였다. 다른 사람 데이터까지 수정 가능하면 보안 이슈다. 아마 ‘본인 데이터만’이 빠진 것 같았다.
회의 중엔 안 말했다. 끝나고 슬랙 보냈다.
“OO님, 권한 부분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모든 데이터’가 다른 유저 데이터도 포함인가요? 아니면 본인 데이터만인가요? 개발 전에 확인하고 싶어서요.”
5분 후 답장.
“아! 본인 데이터만이요. 문서에 추가할게요. 잘 봐주셨네요!”
기분 좋았다. PM도, 나도.
이게 답인 것 같다. 지금은.
6개월 후의 나
기획 전환하면 달라질까.
개발자일 때랑 PM일 때.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들릴 거다.
지금은 ‘개발자가 또 로직 따진다’인데, PM 되면 ‘기획자끼리 의견 나눈다’가 된다.
이상하다. 같은 내용인데.
근데 그게 조직이다. 직책이 대화를 바꾼다.
나는 어떤 PM이 될까.
개발자 의견 잘 듣는 PM? 아니면 ‘내가 더 잘 안다’는 PM?
후자는 되기 싫다. 절대로.
나도 개발자였다. 개발자가 로직 얘기할 때 이유가 있다. 귀찮아서 하는 게 아니다. 문제가 보여서다.
그걸 무시하는 PM. 최악이다.
나는 안 그럴 거다. 개발자 출신 PM의 장점이 뭔데. 개발자 말 이해하는 거잖아.
오늘의 결론
기획 로직 틀렸을 때. 말해야 한다. 근데 방법이 있다.
회의 중 X, 회의 후 O. 지적 X, 질문 O. 공개 X, 비공개 O.
“이거 틀렸는데요” 대신 “이 부분 궁금한데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요” 대신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로직 오류입니다” 대신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같은 내용, 다른 포장.
유치하다고? 아니다. 이게 어른이다. 조직생활이다.
정확함만 중요한 게 아니다. 관계도 중요하다. 둘 다 지키는 게 진짜 능력이다.
나는 배우는 중이다. 개발자에서 PM으로. 로직에서 사람으로.
아직 서툴다. 실수한다. 어제도 회의 중에 바로 말해버렸다. PM 표정이 굳었다. 또 실패했다.
근데 괜찮다. 계속 배우면 된다.
6개월 후 나는 지금보다 나을 거다. 1년 후엔 더 나을 거다.
말하되, 상처 주지 않게. 지적하되, 함께 성장하게. 그게 목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