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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책 10권 읽고 난 후, 회사에서 자발적으로 기획 문서 쓴 이유

PM 책 10권 읽고 난 후, 회사에서 자발적으로 기획 문서 쓴 이유

10권째 덮었을 때 PM 책 10권 읽었다. 6개월 걸렸다. "린 스타트업", "인스파이어드", "프로덕트 매니저 인터뷰". 제목도 비슷비슷하다. 퇴근하고 소파에 앉아서 읽었다. 한 장 읽다가 GPT 켜서 코드 검수하고. 다시 책 펴고. 이게 공부인가 도피인가. 마지막 책 덮었을 때 든 생각. "이거 다 아는 얘기 아닌가?" 사용자 중심, 데이터 기반, 커뮤니케이션. 개발하면서 다 해본 건데. 근데 아는 거랑 하는 건 다르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실습이 필요했다.회의 중 떠오른 아이디어 3주 전 기획 회의였다. 신규 기능 추가 건. 기획자가 PRD 발표했다. 개발팀 5명 앉아서 들었다. "이거 API 구조가 이렇게 되면 나중에 확장이 어려운데요." 내가 말했다. 기획자가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물었다. 그 자리에서 설명했다. 화이트보드에 그렸다. 사용자 플로우, 데이터 구조, 예외 케이스. 15분 설명했다. 팀장이 말했다. "한기획 씨, 이거 문서로 만들어줄 수 있어요?" 기획자도 고개 끄덕였다. 그날 저녁 퇴근하면서 생각했다. 문서 써주면 뭐가 달라지지? 개발자가 기획 문서 쓰는 건 월권 아닌가? 아니면 기회인가?자발적으로 쓴 첫 기획 문서 주말에 노션 켰다. 빈 페이지가 부담스러웠다. "신규 기능 기획안 v1.0" 제목 썼다. 목차 만들었다. 배경/목적/사용자 시나리오/기능 명세/API 설계/예외 처리/일정. PM 책에서 본 구조 그대로. 배경 쓰는 데 2시간 걸렸다. "왜 이 기능이 필요한가?" 답하려니 막혔다. 개발자 관점에선 "기획자가 시켜서"였으니까. 구글 애널리틱스 들어갔다. 사용자 데이터 봤다. 이탈률, 체류 시간, 전환율. 숫자로 근거 만들었다. "현재 3페이지 이탈률 68%, 업계 평균 45%보다 23%p 높음." 사용자 시나리오 쓸 땐 재밌었다. 코딩보다 재밌었다. "직장인 김OO씨(32세)는 퇴근 후 앱을 켠다.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3번 클릭한다. 찾지 못하고 종료한다."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지하철에서. 침대에 누워서. 화장실에서. 우리 서비스 쓰는 사람들. GPT한테 "사용자 페르소나 만들어줘" 시킬 수도 있었는데 안 시켰다. 직접 써보고 싶었다. API 설계는 쉬웠다. 6년 경력이니까. 엔드포인트, 파라미터, 응답 구조. 30분 만에 끝. 예외 처리 항목 쓰다가 깨달았다. "이거 기획자 혼자 생각하기 어렵겠네." 네트워크 끊김, 타임아웃, 동시 요청 충돌. 개발자 아니면 모를 케이스들. 일요일 밤 11시. 문서 완성. A4 12페이지. 뿌듯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이거 회사에 내밀면 어떻게 받아들일까?월요일 아침 공유 월요일 오전. 슬랙에 문서 링크 올렸다. 개발팀 채널에. "지난주 회의 건 정리해봤습니다." 30분 뒤 팀장한테 DM 왔다. "이거 기획팀이랑 공유해도 될까요?" 허락했다. 점심 먹고 돌아왔는데 기획자가 내 자리로 왔다. "이거 진짜 잘 정리하셨네요. 제가 놓친 부분들이 여기 다 있어요." "특히 예외 처리 부분이요. 저희 기획할 때 항상 개발 단계 가서 문제 생기는 부분인데." 기분 좋았다. 인정받는 느낌. 코드 리뷰 받을 때랑 다른 기분. 오후 4시 팀장이 불렀다. "한기획 씨, 다음 프로젝트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줄 수 있어요? 개발자 관점 필요할 것 같아서." "네." 대답했다. 근데 속으로는 생각했다. 이게 내가 원한 건가? 개발 업무는 줄어드는 건가? 아니면 업무가 두 배가 되는 건가? 퇴근 후 인강 재생 그날 퇴근하고 집 와서 PM 인강 틀었다. "프로덕트 오너십" 챕터 3. 강사가 말했다. "PM의 핵심은 Why를 정의하는 겁니다." 나는 What과 How는 잘한다. 무엇을 만들고 어떻게 만드는지. 6년 했으니까. 근데 Why는? 왜 만드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있나? 인강 멈추고 노트에 썼다. "내가 PM 하고 싶은 이유는?"AI가 코딩 다 할 거 같아서 (불안) 기획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기대) 개발자는 대체되고 PM은 안 될 것 같아서 (계산) 진짜로 좋은 프로덕트 만들고 싶어서 (???)4번에 물음표 세 개 붙였다. 이게 진심인가? 아니면 1, 2, 3번을 정당화하려는 핑계인가? 솔직히 모르겠다. 근데 확실한 건 하나 있다. 기획 문서 쓸 때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것. 코드 짤 땐 요즘 시계 자주 본다. 사이드 프로젝트 노션 2주 전부터 사이드 프로젝트 시작했다. 정확히는 "기획"을 시작했다. 코딩은 아직 안 했다. 주제는 "개발자 이직 준비 도우미 앱". 내가 필요한 거. 포트폴리오 관리, 면접 질문 대비, 연봉 계산기. 노션에 페이지 만들었다. "Project Plan", "User Research", "Feature List", "Wireframe", "Tech Stack". User Research부터 시작했다. 개발자 커뮤니티 글 100개 읽었다. 이직 고민하는 사람들 댓글. "포폴 정리가 제일 귀찮다", "면접 질문 예측이 안 돼", "연봉 협상 근거가 없다". 페르소나 3개 만들었다. 주니어(경력 13년), 미들(47년), 시니어(8년~). 각자 고민이 다르다. 주니어는 경험 부족, 미들은 방향성, 시니어는 연봉 협상. Feature List 쓸 때 재밌었다. "이거 있으면 좋겠다" 막 적었다. 20개 넘게 나왔다. 그걸 우선순위 매겼다. Must Have / Should Have / Nice to Have. Must Have만 5개 남았다. 여기서 막혔다. "이걸 어떻게 개발하지?" 생각하니 막막했다. 아니 잠깐. 난 개발자잖아? 왜 막막하지? 그때 깨달았다. GPT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짜려니 막막한 거다. 예전엔 이게 당연했는데. 지금은 GPT한테 "이거 코드 짜줘" 시키는 게 당연해졌다. 씁쓸했다. 기획이 재밌는 이유가 혹시 코딩이 무서워진 건 아닐까? 도피인 건 아닐까? 근데 반대로 생각하면. GPT가 코딩 다 해줄 거면 난 기획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더 효율적인 거 아닌가? 혼란스럽다. 답이 없다. 아내한테 물어봤다 저녁 먹으면서 아내한테 말했다. "나 진짜 PM 전환할까 봐." 아내는 마케터다. 3년차. 원래 디자이너였다가 전환했다. 그래서 이해할 줄 알았다. "왜?" 아내가 물었다. "개발이 재미없어졌어. AI가 다 하잖아. 나는 검수만 하고." "그럼 PM 하면 재밌어?" "지난주에 기획 문서 써봤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어." 아내가 젓가락 놓았다. "오빠 솔직히 말해봐. PM 하고 싶어서야? 아니면 개발 하기 싫어서야?" 찔렸다. 대답 못 했다. "나는 디자인 좋아했어. 근데 마케팅이 더 좋아서 옮긴 거야. 오빠는 뭐가 더 좋아?" "...모르겠어." "그럼 아직 때가 아니야." 아내 말이 맞다. 근데 때를 기다리다가 개발자 일자리 없어지면? 그때는 PM도 못 가면? 밥 먹고 설거지하면서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과 살아남는 것. 둘 다 잡을 수 있나? 아니면 선택해야 하나? 32살이다. 이제 '좋아하는 거' 하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현실을 봐야 하는 나이 아닌가? 개발팀 회식 때 금요일 회식이었다. 고기 먹으면서 시니어 개발자가 말했다. "요즘 채용 공고 보니까 주니어 안 뽑더라. 다 GPT 쓰니까." 다들 고개 끄덕였다. 팀장이 말했다. "우리 회사도 내년엔 신입 안 뽑을걸? 대신 시니어 한 명 더 뽑는대." 분위기 무거워졌다. 다들 술만 마셨다. 후배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괜찮은 거죠? 경력 있으니까?" 팀장이 대답 안 했다. 그게 대답이었다. 2차 가서 시니어가 내 옆에 앉았다. "한기획 씨, 요즘 기획 쪽 관심 있다며?" "네...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알지. 작은 회사잖아. 기획 문서 쓴 거 소문 났어." "..." "내 생각엔 잘 생각한 거 같아. 개발만 10년 넘게 하면 나중에 갈 데 없어. 나처럼." 시니어 개발자는 42살이다. 연봉 9000만원. 근데 표정이 어둡다. "PM으로 가면 50대까지 일할 수 있어. 개발자는... 글쎄."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시니어의 말이 현실인가? 아니면 패배주의인가? 이력서 넣어본 결과 궁금했다. 내가 정말 PM 갈 수 있나? 시장은 날 원하나? 이력서 수정했다. "백엔드 개발자" 대신 "Product Manager 지원". 경력 6년을 "개발 경험 기반 PM 준비"로 포장했다. 자기소개서 썼다. "개발자 출신이라 기술 이해도가 높습니다. 최근 6개월간 PM 역량 개발했습니다. 기획 문서 작성 경험 있습니다." PM 채용 공고 5개 찾았다. 경력 요구사항 "PM 경력 3년 이상" 또는 "개발 경력 가능". 후자에 3개 넣었다. 2주 기다렸다. 결과 왔다. 1차: 서류 탈락 2차: 서류 탈락3차: 서류 합격 → 1차 면접 → 탈락 3차 면접 피드백. "개발 경험은 좋으나 PM 경험 부족. 주니어 PM으로 시작하기엔 연차 높음. 연봉 조정 필요." 연봉 조정이 얼마나? 물어봤다. "5000 정도?" 지금 6200인데 5000으로? 1200 깎이는 건가? 아내한테 말했다. "PM 가려면 연봉 1000 이상 깎여." "괜찮아. 우리 살 수 있어." 고마운데 찝찝하다. 아내 연봉이 5800이다. 내가 5000 되면 아내보다 적다. 자존심 상한다. 이게 가부장적 사고인 건 아는데 기분은 그렇다. 더 큰 문제는 이거다. "PM 주니어로 5000 받으면서 다시 배우느니 개발자로 7000 받으면서 GPT 굴리는 게 낫지 않나?" 계산기 두드렸다. 5년 뒤 연봉 추이. 개발자 vs PM. 변수가 너무 많다. AI 발전 속도, 시장 변화, 내 성장 속도. 답 안 나온다. 엑셀 껐다. 코드 리뷰 하다가 월요일 오전. 주니어 코드 리뷰했다. PR 제목 "결제 모듈 리팩토링". 코드 열어봤다. 깔끔했다. 변수명 명확하고 함수 분리 잘 됐다. 주석도 적절했다. 근데 로직에 구멍 있었다. 동시 결제 요청 왔을 때 race condition 발생 가능. 댓글 달았다. "락 처리 필요합니다. redis 분산 락 추천." 주니어가 바로 답했다. "아 맞다. GPT한테 물어볼 때 그 부분 빠뜨렸네요." 그 말 듣고 멍했다. "GPT한테 물어볼 때 빠뜨렸다"고? 코드 전체를 GPT가 짠 건가? 물어봤다. "이거 GPT 얼마나 썼어요?" "70% 정도요? 제가 요구사항 정리해서 던지고 나온 코드 수정했어요." "..." "선배님도 쓰시잖아요. 다들 쓰던데요?" 맞다. 나도 쓴다. 근데 70%는 처음 들었다. 나는 30% 정도인데. 주니어가 말했다. "요즘은 프롬프트 잘 쓰는 게 실력 아닌가요?"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근데 뭔가 씁쓸하다. 오후에 코드 또 봤다. 주니어가 락 처리 추가했다. 빠르다. 근데 이게 주니어 실력인가 GPT 실력인가? 구분이 안 된다. 그리고 구분이 중요한가? 퇴근하면서 생각했다. 5년 뒤엔 신입도 GPT로 시니어급 코드 짠다. 그때 내 가치는? 코드 검수? 그것도 AI가 더 잘하면? PM은 어떨까? AI가 기획도 하나? 사용자 인터뷰도 하고 의사결정도 하나? 아마 한다. 근데 덜 한다. 지금은. "지금은"이라는 게 함정이다. 언제까지 "지금"일까? 사이드 프로젝트 포기 수요일 밤. 사이드 프로젝트 노션 열었다. 기획 완료. 와이어프레임 완료. 기술 스택 정리 완료. 이제 코딩 시작해야 한다. 커서 깜빡인다. 손이 안 움직인다. GPT 창 열었다. "FastAPI로 사용자 인증 API 만들어줘. JWT 토큰 방식. 리프레시 토큰 구현." 코드 나왔다. 복붙했다. 돌려봤다. 된다. "PostgreSQL 연동해줘. SQLAlchemy ORM 써서." 코드 나왔다. 복붙했다. 된다. 30분 만에 백엔드 골격 완성. 예전 같으면 3일 걸렸다. 근데 재미없다. 허무하다. 이게 내가 한 건가? GPT가 한 건가? 프론트엔드 시작하려다가 껐다. 노션도 껐다. 아내가 물었다. "왜 안 해?" "재미없어." "기획은 재밌었잖아." "기획만 하고 개발은 GPT 시키면 되는 거 아냐? 그럼 난 뭐 하는 사람이야?" 아내가 웃었다. "그게 바로 PM이잖아." 맞다. PM은 만들지 않는다. 만들게 한다. 방향 정하고 의사결정하고 조율한다. 그게 내가 원한 건가? 손 안 쓰고 머리만 쓰는 거? 모르겠다. 10년 넘게 키보드 두드렸는데 그게 정체성이었는데. 그걸 내려놓을 수 있나? 내려놓아야 하나? 진짜 이유 금요일 저녁. 혼자 커피 마시면서 노트 펼쳤다. 진짜 이유를 적어보기로 했다. "내가 PM 하고 싶은 진짜 이유는?" 적다가 지웠다. 또 적었다. 또 지웠다. 30분 뒤 남은 한 줄. "무섭다." 개발이 무섭다. AI한테 밀릴까 봐. 40살 되면 짤릴까 봐. 연봉 깎일까 봐. PM이 안전해 보였다. 사람을 다루는 일. 의사결정하는 일. AI가 못 할 것 같았다. 근데 솔직히 확신은 없다. PM도 AI 온다. 다 온다. 그럼 대체 뭘 해야 하나? 적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준비하는 거라고 믿고 싶다." "기획이 진짜 좋은 건지 아직 모르겠다." "근데 개발만 계속하긴 무섭다." "이게 커리어 전환인가 커리어 도피인가?" 답 안 나온다. 아마 해봐야 안다. 책 10권 읽었다. 기획 문서 썼다. 인강 들었다. 사이드 프로젝트 기획했다. 이게 진짜 전환의 신호일까? 모르겠다. 근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처럼 계속 가긴 싫다. 뭔가 바꿔야 한다. 방향이 맞든 틀리든. 다음 주 월요일 월요일 출근한다. 슬랙 연다. 기획팀에서 메시지 왔다. "한기획 님, 다음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 참석 가능하세요? 개발 관점 인풋 필요합니다." "네." 답했다. 개발자로 가는가? PM으로 가는가? 아직 모른다. 근데 일단 기획 회의엔 간다. 거기서 뭐 보이겠지. 코드 에디터도 연다. 오늘 할 개발 업무 본다. GPT 창도 열려 있다. 두 개 다 한다. 지금은. 언젠간 선택해야 한다. 근데 오늘은 아니다. 책상 옆에 PM 책 쌓여있다. 모니터엔 코드 떠 있다. 이게 내 현실이다. 32살 개발자. 아니 32살 뭔가. 점심 먹고 생각하자. 지금은 일이나 하자.전환의 신호인지 도피의 핑계인지, 아직 모른다. 근데 멈춰있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