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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 25 Dec, 2025
회사에서 자발적으로 기획 문서를 쓰면서 테스트해본 전환
실험 시작 3개월 전부터 회사에서 몰래 기획을 해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몰래'는 아니다. 그냥 아무도 안 물어봤을 뿐. 계기는 간단했다. 새 기능 개발 회의에서 기획자가 "개발 가능한지 검토 부탁드려요" 했다. 기획서를 봤는데 뭔가 이상했다. API 구조가 비효율적이었다. 데이터베이스 설계를 생각 안 한 기획이었다. '이거 다시 짜야 하는데...' 그날 퇴근하고 노션을 켰다. 내가 생각하는 기획안을 써봤다. 2시간 걸렸다. 재밌었다. 다음 날 팀장한테 "제가 다른 방향으로 기획해봤는데요" 했다. 팀장이 봤다. "오 이게 낫네요. 기획팀한테 공유해보죠." 기획자는 별로 안 좋아했다. 당연하다. 개발자가 참견한 거니까. 하지만 그 기능은 내 방식대로 개발됐다. 그때부터 중독됐다.기획이 뭔지 알았다 기획은 생각만큼 추상적이지 않았다. 책에서 본 '사용자 니즈', '페르소나', '저니맵' 이런 거 말고. 실제로는 SQL 쿼리 짜듯이 로직을 짜는 거였다. "사용자가 A를 클릭하면 B 화면으로 간다. B에서 C 조건이 충족되면 D 액션이 실행된다." 코드랑 똑같다. 다만 파이썬 대신 한글로 쓰는 것. 두 번째 기획 문서를 쓸 땐 피그마도 썼다. 화면 설계를 직접 그렸다. 디자이너한테 물어보면서. "이거 여기 버튼 크기 괜찮아요?" "여기 여백 8px 맞아요?" 디자이너가 신기해했다. "개발자분이 피그마를 쓰세요?" "요즘 배우는 중이에요." 거짓말은 아니다. 유튜브 보면서 3일 배웠다. 세 번째 기획은 아예 처음부터 내가 제안했다. "이 기능 이렇게 만들면 어떨까요?" 회의 시간에. 팀장이 "좋네요, 문서화해서 올려보세요." 그렇게 공식적으로 내 기획이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개발은 다른 팀원이 했다. 나는 기획자처럼 검수했다. "여기 버튼 위치 바꿔주세요." "이 에러 메시지 문구 수정이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코드를 짤 때보다.개발이 시시해졌다 그 이후로 코딩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재미없다'기보다 '의미없다'는 느낌. API 하나 짜는데 2시간 걸렸다. 예전에는 3시간 걸렸을 거다. 그런데 중간에 GPT한테 시켰다. 30분 만에 80% 완성. 나머지 1시간 30분은 검수하고 수정. '내가 한 게 뭐지?' 기획할 때는 안 그랬다. 기획 문서 쓸 때는 GPT가 별로 도움이 안 됐다. "이 기능의 우선순위를 정해줘" 물으면 뻔한 대답만 했다. 사용자 흐름도 GPT는 맥락을 몰라서 이상하게 짰다. 기획은 아직 내 머리가 필요했다. 개발은 점점 덜 필요했다. 한 달 전쯤. 주니어한테 "이 기능 개발 부탁" 했다. 그 친구가 코파일럿 켜놓고 1시간 만에 끝냈다. 내가 3시간 걸렸을 거다. '아 나보다 빠르네.' 아니다. '코파일럿이 나보다 빠르네.' 그날 저녁 아내한테 말했다. "나 기획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아내가 물었다. "재밌어?" "응. 코딩보다 재밌어." 처음으로 확신했다. 기획자들의 반응 기획팀 사람들은 미묘했다. 처음엔 "개발자분이 기획까지 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했다. 좋은 말이지만 뉘앙스가 좀 이상했다. '네가 왜 우리 일을?' 두 번째부턴 "여기 이렇게 하면 개발 공수가 줄어들죠?" 물었다. "네, 그렇죠." "그럼 이렇게 할게요." 기획이 내 의견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세 번째부턴 회의에 나를 불렀다. "한기획 님, 이거 기술적으로 가능해요?" "가능한데 이렇게 하면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오케이, 그렇게 진행하죠." 네 번째부턴 기획자가 먼저 물었다. "한기획 님, 이 기능 기획하실래요?" 그때 알았다. 내가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기획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기획 쪽으로 전환 생각 있으세요?" "생각 중이긴 한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단 지금처럼 하시면 될 것 같아요. 포트폴리오 쌓이잖아요." 포트폴리오. 그렇구나. 내가 지금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었구나.재미의 정체 왜 기획이 재밌는지 생각해봤다. 첫째, 결과가 빨리 보인다. 코드는 짜고 테스트하고 배포하고 버그 잡고. 2주 걸린다. 기획은 쓰고 회의하고 확정되면 끝. 3일. 둘째, 사람들이 반응한다. 코드는 아무도 안 본다. 잘 짜도 "오 깔끔하네요" 한마디. 기획은 회의 때 "이거 좋은데요?" "이렇게 하면 더 나을 것 같아요" 의견이 나온다. 살아있는 느낌. 셋째, 전체가 보인다. 개발할 땐 내 파트만 본다. API 하나. 화면 하나. 기획할 땐 전체 흐름을 본다. 사용자가 앱을 켜고 로그인하고 상품을 보고 결제한다. 그 전체를 설계한다. 마치 레고 설명서를 만드는 거다. 개발은 레고 조각을 끼우는 거고. 나는 설명서 만드는 게 더 재밌었다. 넷째, AI가 덜 위협적이다. 솔직히 이게 제일 크다. GPT는 코드를 잘 짠다. 점점 더 잘 짤 거다. 하지만 "우리 서비스에 이 기능이 필요한 이유"는 GPT가 모른다. "이 버튼을 여기 둬야 하는 이유"도 모른다. 기획은 맥락이다. 맥락은 아직 AI가 못 한다. 적어도 당분간은. 개발이 아까운가 6년을 개발했다. 파이썬, Django, FastAPI, PostgreSQL, Redis, Docker, AWS. 다 배웠다. 이제 버린다고? 아깝긴 하다. 하지만 버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기획할 때 개발 지식이 무기가 됐다. "이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해요"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개발 2주 줄어들어요"를 제안할 수 있었다. 일반 기획자는 못 한다. 개발자 출신이니까 가능한 거다. 그리고 코딩을 완전히 안 하는 것도 아니다. 간단한 프로토타입은 내가 직접 짠다. "이런 느낌입니다" 하면서 보여주면 팀이 이해가 빠르다. 개발 6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획의 베이스가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덜 아까웠다. 현실적 문제들 물론 장미빛은 아니다. 첫째, 연봉. 개발자로 이직하면 7500은 받는다. PM 신입은 4500부터 시작이다. 3000만원 차이. 근데 5년 뒤를 생각하면? AI가 주니어 개발자 일을 다 하면? 그때 개발자 몸값은 얼마일까? PM은? 아직은 안전해 보인다. 적어도 3년은. 둘째, 경력 인정. 개발 6년이 기획 경력으로 인정될까? 회사마다 다르다. 어떤 곳은 "개발자 출신 환영"이다. 어떤 곳은 "기획 경력 3년 필수"다. 운이다. 셋째, 정체성. 나는 개발자인가 기획자인가. 명함에는 백엔드 개발자. 하는 일은 반반. 애매하다. 이직할 때 이력서에 뭐라고 쓰지? "개발 가능한 PM"? 그런 포지션이 있나? 찾아봤다. 있다. "테크니컬 PM". "프로덕트 엔지니어". 희망이 보였다. 6개월 계획 일단 지금 회사에서 1년 더 있기로 했다. 그동안 기획 문서를 최소 10개 쓴다. 실제로 개발된 기능으로. 그게 포트폴리오다. 피그마 실력을 중급까지 올린다. 와이어프레임 정도는 혼자 뚝딱. PM 관련 책 10권 더 읽는다. 지금까지 10권. 총 20권이면 이론은 충분하다. 사이드 프로젝트 하나 기획부터 끝까지. 작게. MVP. 실제로 런칭까지. 그리고 1년 뒤 이직한다. 테크니컬 PM으로. 연봉은 아마 6000 정도? 지금이랑 비슷하다. 괜찮다. 5년 뒤를 보는 거다. 아내는 찬성했다. "네가 행복하면 돼." 부모님은 여전히 이해 못 한다. "개발자가 좋은 직업인데..." 괜찮다. 내 인생이니까. 테스트 결론 3개월간 기획을 해봤다. 결론: 재밌다. 개발보다 재밌다. 정확히는 '나한테는' 재밌다. 모든 개발자한테 맞는 길은 아니다. 코딩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계속 개발하면 된다. AI 시대에도 10배 엔지니어는 필요하다. 나는 아니었다. 나는 코딩이 좋았던 게 아니라 '뭔가를 만드는 것'이 좋았던 거다. 그리고 기획이 더 많은 걸 만들 수 있었다. 적어도 내 능력으로는. 아직 확신은 아니다. 80% 정도. 남은 20%는 실제로 PM이 되고 1년 일해봐야 안다. 그래도 테스트는 성공이다. 회사에서 몰래 기획해보길 잘했다. 이직하고 나서 '아 이거 아닌데' 하는 것보단 낫다.실험은 계속된다. 출근길에 PM 팟캐스트 들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