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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에서
- 09 Dec, 2025
회의실에서 '그거 GPT한테 시키면 되지 않아요?'라고 말할 때의 기분
회의실에서 '그거 GPT한테 시키면 되지 않아요?'라고 말할 때의 기분 오늘도 했다. 회의실에서 기획자가 '이 기능은 개발 공수 얼마나 나올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거 GPT한테 시키면 하루 만에 나올 것 같은데요'라고 답했다. 순간 공기가 싸해졌다. 기획자는 '아... 네...'라고만 했다. 옆자리 선배 개발자가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너 또 그러네'였다. 회의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나 지금 도움 주는 건가, 분위기 깨는 건가.6개월 전부터 버릇처럼 이 말을 하기 시작한 게 6개월쯤 됐다. 처음엔 진짜 도움 주려고 했다. 'GPT 쓰면 빠를 것 같아요'는 기획자가 일정 짤 때 도움 되는 정보 아닌가. 개발 공수 줄어든다는 건 좋은 거 아닌가. 근데 회의 때마다 이 말이 나오니까 이상해졌다. '이 기능 구현 가능한가요?' - '네, GPT 쓰면요.' 'API 연동 복잡할까요?' - '아뇨, GPT한테 물어보면 돼요.' '테스트 코드 작성은?' - '그것도 GPT가 짜줘요.' 내가 듣기에도 이상했다. 마치 '나 필요 없어요'라고 광고하는 느낌.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왜냐면 사실이니까. 진짜로 GPT가 하루 만에 짜준다. 내가 3일 걸릴 거 주니어가 GPT 쓰고 하루 만에 끝낸 거 봤다. 그걸 아는데 어떻게 '3일 걸립니다'라고 말하나. 근데 이게 도움인가.기획자의 표정 오늘 회의 끝나고 기획자가 말 걸었다. '한기획 님, 요즘 회의 때... 음... GPT 얘기 많이 하시는데...' 조심스러웠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 '아 네, 제가 요즘 GPT 많이 써서요. 도움 되시라고...' '아니 도움은 돼요. 근데 제가... 기획할 때 좀 위축되는 것 같아요.' 그 말 듣고 멈칫했다. '제가 뭘 제안해도 "그거 GPT 쓰면 되는데"라고 하시면, 그럼 제가 이걸 왜 고민한 건가 싶기도 하고... 아 이게 불만은 아니고요. 그냥 제 마음이 그렇다는...' 기획자는 말을 흐렸다. 나는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근데 속으론 생각했다. '그래도 사실인데.' 자리로 돌아와서 한 시간 동안 일이 안 됐다. 마우스만 움직였다 멈췄다 했다. 내가 도움 준 건가, 기획자 자존감 깎은 건가. 더 정확히는, 내가 도움을 주려고 한 건가, 내 불안을 전염시킨 건가.개발자의 방어기제 냉정하게 생각해봤다. 내가 회의 때마다 'GPT 쓰면 된다'고 말하는 이유. 하나. 진짜 GPT가 빠르다. 이건 사실. 둘. 기획자가 일정 짤 때 도움 된다. 이것도 맞다. 셋. ...내가 불안하다. 이게 진짜. 솔직히 말하면, 나는 GPT 얘기를 할 때마다 '나도 알아요, 나도 이거 쓴다고요, 나 도태 안 됐어요'라고 증명하고 싶은 거다. 기획자한테 말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말하는 거다. '저 개발자, 아직도 손으로 일일이 다 짜네'라고 생각될까 봐 무서워서, 먼저 'GPT 씁니다'를 선언하는 거다. 방어기제였다. 근데 그게 회의실에서 기획자한테 '당신 아이디어는 GPT면 충분해요'처럼 들렸다면. 내 불안이 남의 불안이 된 거다. 기술 지적이 아니라 불안 전파 문제는 이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다. 개발자 단톡방 보면 비슷한 얘기 많다. '오늘 기획자가 ㅇㅇ 기능 제안했는데 나 GPT한테 시켜서 2시간 만에 끝냈음 ㅋㅋ' '기획 회의 때 "이거 AI 쓰면 되는데요?" 했더니 분위기 싸해짐' '요즘 기획자들 AI 모르나? 나만 아는 거 같음' 다들 비슷하다. 개발자가 기획자한테 'GPT 쓰면 된다'고 말하는 건, 기술 조언이 아니다. 불안 전파다. '나도 AI 알아요, 나 아직 쓸모있어요'를 증명하려다가, 기획자한테 '당신 일도 AI면 충분할지 몰라요'를 전염시킨다. 도움 주려던 게 방해가 된다. 냉정하게 보면, 기획자는 'GPT가 코드 짜준다는 거' 이미 안다. 모를 리가 없다. 뉴스에 매일 나오는데. 그럼 내가 회의 때마다 'GPT 쓰면 된다'고 말하는 건, 정보 전달이 아니다. 불안 확인이다. '나도 불안해요. 당신도 불안하죠?' 이걸 공유하면 뭐가 나아지나. 아무것도. 도움과 방해의 경계 그럼 뭐가 도움이고 뭐가 방해인가. 생각을 정리해봤다. 도움: '이 기능은 라이브러리 ㅇㅇ 쓰면 빠를 것 같아요.' 방해: '이거 GPT 쓰면 되는데요?' 도움: '개발 공수 줄일 수 있는 방법 찾아볼게요.' 방해: '요즘 다들 GPT 쓰는데 우리도 써야죠.' 도움: 구체적 대안 제시. 방해: 추상적 불안 공유. 차이는 명확했다. 도움은 '어떻게'를 말하고, 방해는 '왜'를 흔든다. 'GPT 쓰면 된다'는 '어떻게'가 아니다. '당신 고민 무의미할 수도'라는 '왜' 흔들기다. 기획자가 3일 고민해서 만든 기획안에, 내가 '그거 GPT 10분이면 되는데요?'라고 하면. 기획자는 듣는다. '내가 3일 고민한 게 10분짜리였어?' 이게 도움일 리 없다. 내가 바꿔야 할 것 오늘 저녁에 그 기획자한테 메신저 보냈다. '오늘 말씀하신 거 생각해봤어요. 제가 회의 때 GPT 얘기 너무 많이 했네요. 죄송합니다. 도움 주려던 건데 오히려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아요.' 답장 왔다. '아니에요. 한기획 님이 나쁘게 하신 건 아니에요. 저도 요즘 AI 때문에 좀... 예민했나 봐요. 근데 한기획 님 말씀 들으면 항상 기술적으로 배우는 게 있어요. 앞으로도 조언 부탁드려요.' 착한 사람이다. 근데 나는 안다. 내 조언 중 절반은 조언이 아니라 불안이었다는 걸. 앞으로 바꿀 것. 회의 때 'GPT 쓰면 된다'는 말 줄이기. 대신 '이렇게 하면 빠를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하기. 기획자 아이디어에 기술 지적하기 전에, '이거 왜 이렇게 기획하셨어요?' 먼저 물어보기. 내 불안을 남한테 전염시키지 않기. 불안하면 혼자 끙끙대기. 단톡방에 푸념하지 말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기획 전환 준비하면서, 개발자 정체성 흔들리는 걸 기획자한테 풀지 않기. 내 진로 고민은 내가 해결할 문제다. 기획자는 내 심리 상담사가 아니다. PM 되려는 사람이 아이러니한 건, 나 지금 PM 준비한다고 기획 공부하는데. 정작 기획자 마음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기획자가 아이디어 내면 기술적 가능성부터 따지고, 'GPT 쓰면 된다'며 중요도 낮추고, 개발 공수로만 판단하고. 이게 개발자 마인드다. PM은 반대여야 한다. 기획자 의도 먼저 이해하고, 기술은 그 다음에 고민하고, 'GPT 쓰면 된다'는 해결책이지 평가가 아니고. 나는 6개월 동안 PM 책 10권 읽으면서, 정작 옆자리 기획자 마음은 한 번도 안 읽었다. 웃긴다. 개발자 출신 PM이 강점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개발자 출신이라 극복해야 할 것투성이다. 기술 아는 게 장점이 아니라, 기술로 모든 걸 재단하는 게 단점이다. 'GPT 쓰면 된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PM이 아니라 개발자다. PM이 되려면 'GPT 쓰면 뭐가 더 좋아질까?'를 물어야 한다. 아직 멀었다. 내일 회의 내일도 기획 회의 있다. 이번엔 다르게 해보려고 한다. 기획자가 '이 기능 개발 가능할까요?'라고 물으면, 'GPT 쓰면 된다' 대신 '어떤 목적으로 이 기능 넣으셨어요?'부터 물어볼 거다. 기획 의도 들어보고, 그 다음에 '이렇게 하면 빠를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제안할 거다. 'GPT'는 해결책으로만 쓰고, 평가로는 안 쓸 거다. 그리고 입 다물 타이밍 연습. 모든 기획에 기술 지적할 필요 없다. 내가 아는 걸 다 말할 필요도 없다. 가끔은 그냥 '좋네요'라고만 해도 된다. 이게 개발자한테는 어색하다. 우린 문제 찾는 게 습관이니까. 근데 PM은 문제보다 가능성을 먼저 봐야 한다고 한다. 어제 읽은 PM 책에 나왔다. 내일 연습해본다. 실패할 것 같긴 하다. 6개월 습관이 하루에 안 바뀐다. 그래도 시도는 해본다. 일단 회의 들어가기 전에 포스트잇 하나 써서 노트북에 붙여놓을 거다. 'GPT 언급 금지.' 유치하지만 필요하다.도움 주려다가 불안 전염시키는 건, 나도 남도 불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