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문서를 쓸 때가 가장 재밌던 순간
- 10 Dec, 2025
지난주 목요일
지난주 목요일. 오후 3시. 팀장이 슬랙에 멘션했다. “신규 기능 기획안 한번 써보실래요?”
개발팀에서 기획 문서 쓰는 거 처음이었다. 원래는 기획팀에서 던져주면 그거 보고 코딩하는 거였다.
근데 이번엔 달랐다. 기획자가 바빠서 개발자가 직접 써야 했다. 나한테 온 이유는 뭐 간단했다. “한기획님 그쪽 기능 제일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해봤다.

첫 문장부터 달랐다
노션 새 페이지 열었다. 제목 적었다. “사용자 피드백 자동 분류 기능 기획안.”
그리고 ‘배경’ 섹션부터 쓰기 시작했다. 손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현재 고객센터에 하루 500건 문의가 온다.” “담당자가 수동으로 분류하는 데 1건당 평균 2분.” “하루 1000분. 16.6시간.” “이걸 AI로 자동화하면 담당자는 답변만 하면 된다.”
숫자 쓰면서 재밌었다. 이유가 명확해지는 느낌. 코딩할 땐 이런 거 생각 안 했다. 그냥 “이거 만들어주세요” 하면 만들었다.
근데 기획안은 달랐다. 왜 만드는지, 누가 쓰는지, 뭐가 좋아지는지. 다 써야 했다.
그리고 그게 재밌었다.
사용자 시나리오
“사용자 시나리오” 섹션 쓸 때. 진짜 고객센터 담당자가 된 것처럼 썼다.
“김민지(고객센터 3년차)는 오전 9시 출근한다.” “받은편지함에 밤새 쌓인 문의 87건.” “하나씩 열어서 제목 보고 카테고리 태그 달고.” “결제 문의, 배송 문의, 환불 문의…”
이걸 쓰면서 웃겼다. 내가 소설 쓰나?
근데 계속 썼다.
“자동 분류 기능 도입 후.” “김민지는 출근해서 이미 분류된 문의함을 본다.” “결제 문의 32건, 배송 문의 28건…” “바로 답변 작성 시작.” “하루 처리량이 87건에서 150건으로.”
시나리오 다 쓰고 나니까. 이게 왜 필요한지 누가 봐도 알 것 같았다.
코드로는 이런 거 못 보여준다.

기능 명세
개발자니까 이 부분은 쉬웠다.
“1. 문의 텍스트 자연어 처리” “2. GPT-4 API 호출하여 카테고리 추천” “3. 신뢰도 70% 이상일 때 자동 분류” “4. 70% 미만일 때 담당자 확인 요청” “5. 학습 데이터 축적하여 정확도 개선”
기술 스펙 쓰면서도 재밌었다. 평소 코딩할 땐 이미 정해진 스펙대로 짜는 거였다.
근데 지금은 내가 정하는 거다. “왜 70%냐?” 스스로 물었다. “80%면 너무 보수적이고, 60%면 오류 많고.” “70%가 적당하다.”
근거도 찾았다. 예전에 본 논문. NLP 분류 정확도 벤치마크. 업계 평균이 75%였다. 우리 서비스는 초기 버전이니까 70% 목표.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결정하는 게. 코딩보다 재밌었다.
코딩은 “어떻게”만 생각하면 됐다. 기획은 “왜”, “무엇을”, “어떻게”, 다 생각해야 했다.
그게 좋았다.
예상 효과
이 부분 쓸 때 제일 신났다.
“고객센터 담당자 업무 시간 40% 절감” “문의 처리 속도 1.7배 향상” “담당자 단순 반복 작업 감소로 만족도 증가” “고객 대기 시간 평균 2시간에서 45분으로 단축”
숫자로 쓰니까 설득력 있어 보였다. 실제로 이렇게 될지는 모른다. 근데 합리적 추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썼다.
“ROI: 개발 비용 2400만원(개발자 2명 3개월)” “절감 효과: 고객센터 인력 1명 연간 3600만원” “8개월 만에 회수 가능”
이것도 재밌었다. 개발자일 땐 ROI 같은 거 생각 안 했다. “만들래요? 만들게요.”
근데 지금은 비즈니스를 생각하는 거다. 이게 기획이구나.
5시간
문서 완성했다. 시계 봤다. 오후 8시.
5시간 동안 기획 문서만 썼다. 점심 먹고 3시부터 8시까지.
근데 전혀 안 지루했다. 오히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평소 코딩할 때. 2시간만 지나도 딴짓하고 싶었다. 유튜브 보고, 커피 마시러 가고, 슬랙 확인하고.
근데 오늘은. 화장실도 한 번밖에 안 갔다.
이게 몰입이구나.

팀장 반응
다음날 아침. 팀장이 슬랙에 댓글 달았다.
“와 이거 퀄리티 진짜 좋은데요?” “기획팀에 공유해도 될까요?”
기분 좋았다.
점심시간에 기획자가 찾아왔다. “한기획님 이거 진짜 잘 쓰셨어요.” “개발자 출신이라 기술 이해도가 높아서 그런가.” “저희보다 더 구체적이에요.”
그 말 듣고. 뭔가 찾은 것 같았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 지하철에서 생각했다.
오늘 5시간 동안 기획 문서 쓸 때. 코딩 6년 하면서 한 번도 못 느낀 재미를 느꼈다.
왜일까.
코딩은 정답이 있다. 작동하면 정답. 안 되면 오답. 테스트 돌리면 Pass 아니면 Fail.
명확하긴 한데. 뭔가 재미가 없었다. 요즘엔 특히 더.
GPT한테 시키면 되는데 내가 왜 하지?
근데 기획은 달랐다. 정답이 없다. 내가 결정하는 거다.
“70%로 할까 80%로 할까?” “이 기능 먼저 할까 저 기능 먼저 할까?”
선택의 연속. 그리고 그 선택에 이유를 붙이는 것.
이게 재밌었다.
금요일 오전
금요일 아침. 출근해서 노션 열었다.
어제 쓴 기획 문서. 다시 읽어봤다.
뿌듯했다. 내가 만든 코드 볼 때보다 더 뿌듯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 기획 하고 싶은 거 아닐까?”
6개월 전부터 느낀 거. 코딩보다 기획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거.
어제 확신했다.
월요일
주말 내내 생각했다.
개발 6년 했다. 연봉 6200만원. 이직하면 7000도 받을 수 있다.
근데 계속 코딩할 거냐. AI가 점점 잘하는 걸.
아니면 기획으로 가느냐. 연봉 깎이고 주니어부터 시작하는 거.
월요일 아침. 출근해서 또 코딩했다.
FastAPI 엔드포인트 하나 만드는 거. 예전엔 30분 걸렸다. 지금은 GPT한테 시켜서 5분.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 5년 뒤엔 1분 되겠네.” “10년 뒤엔 그냥 말로 시키면 되겠네.”
그럼 난 뭐 하지?
점심시간
점심 먹으면서 기획자한테 물어봤다. “기획 일 어때요?”
“재밌죠. 근데 힘들어요.” “개발자처럼 정답이 없어서.” “끊임없이 결정하고 설득해야 해요.”
“근데 저 지난주에 기획 문서 써봤는데.” “진짜 재밌더라고요.”
“그래요? 한기획님 개발 지식 있으니까.” “PM 해도 잘하실 것 같은데.”
“진심이에요?”
“네. 요즘 개발자 출신 PM 많이 뽑아요.” “기술 이해도 높은 게 장점이거든요.”
그 말 듣고. 뭔가 용기 났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집에서. 노트북 켰다.
“PM 이력서 작성법” 검색했다.
그리고 내 경력 정리하기 시작했다.
“백엔드 개발 6년” “Python, Django, FastAPI” “AWS 인프라 구축 및 운영” “프로젝트 기획 문서 작성 경험”
마지막 줄. “사용자 관점에서 생각하는 개발자에서 제품을 만드는 기획자로.”
뭔가 오글거렸다. 근데 진심이었다.
신호일까
지난주 목요일. 기획 문서 쓰면서 느낀 거.
이게 신호인 것 같다.
6년 동안 코딩하면서 한 번도 못 느낀 재미. 5시간 동안 몰입해서 문서 쓰는 것.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인 것 같다.
물론 무섭다. 연봉 깎일 것 같고. 주니어로 시작해야 하고. 기획 경력 0년이고.
근데.
10년 뒤를 생각하면.
AI가 코딩 다 하는 세상에서. 나는 뭘 하고 있을까.
기획은 아직 AI가 못 한다. 왜 만드는지, 누구를 위한 건지, 이게 비즈니스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건 사람이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리고.
지난주 목요일처럼. 재밌게 일하고 싶다.
코드 짜면서 “이거 GPT한테 시키면 되는데”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기획하면서 “이거 내가 결정하는 거구나” 생각하면서.
어제 또 기획 문서 하나 썼다. 3시간 걸렸다. 재밌었다. 이게 답인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