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전환은 도피인가 진화인가
- 22 Dec, 2025
기획 전환은 도피인가 진화인가
오전 10시, 코드 리뷰
주니어가 올린 PR을 본다. 200줄짜리 함수. 근데 잘 짰다.
“GPT한테 물어봤어요.”
3일 걸릴 걸 하루 만에. 내가 짰으면 더 오래 걸렸을 거다.
코멘트 단다. “수정 없음. Approve.”
키보드에서 손을 뗀다. 뭔가 이상하다.
나는 뭘 한 거지?

점심, 기획자 앞에서
PM 지혜가 말한다. “이번 기능, 개발 일정 얼마나 걸려요?”
“3주요.”
“2주 안에 안 돼요? 경쟁사가…”
짜증 난다. 근데 반박할 말이 없다. GPT 쓰면 2주 맞다.
“2주 해볼게요.”
식당 나오면서 생각한다. 저 사람은 AI한테 안 빼앗길까?
기획은 ‘왜’를 고민한다. AI는 ‘어떻게’만 안다.
그런가?

오후 3시, 검색
“PM 연봉”
“개발자 출신 PM”
“AI 시대 기획자 전망”
탭이 12개 열려 있다. 다 비슷한 내용이다.
어떤 글: “기획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글: “GPT가 PRD도 씁니다.”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브런치 하나 더 연다. 개발자에서 PM 전환한 사람.
“제 선택은 옳았습니다. 코딩은 AI가 하고…”
닫는다. 너무 희망적이다. 불안하다.
오후 5시, 회의
기획 리뷰 회의. 지혜가 발표한다.
“사용자 페인 포인트는 이거고요, 그래서 이 기능을…”
논리가 약하다. 데이터도 부족하다.
말하려다 참는다. 너 일이잖아.
근데 계속 생각난다. 저거 왜 안 물어봤지? 저 지표 의미 없는데?
회의 끝나고 지혜한테 슬랙 보낸다.
“저 부분 데이터 더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답장: “오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기분이 이상하다. 좋으면서 찝찝하다.
나는 왜 기획자 일을 신경 쓰지?

퇴근길, 지하철
유튜브 숏츠 본다. “AI가 대체 못 하는 직업 TOP 5”
기획자가 3위다. 이유: “전략적 사고”
댓글 본다. “ㅋㅋ 기획서도 GPT가 써주는데”
누가 맞는 거야.
옆자리 사람 본다. 노트북 켜고 코딩한다. Python이다.
동질감 느낀다. 그리고 허무함.
우리 다 똑같이 불안하구나.
집 도착한다. 현관문 열면서 생각한다.
나는 도망치는 건가, 준비하는 건가.
밤 10시, 아내와 대화
“오늘도 기획 생각했어?”
“응.”
“하고 싶어?”
“모르겠어. 하고 싶은 건지, 개발이 무서운 건지.”
아내가 웃는다. “그게 뭐가 달라?”
”…뭐?”
“무서우니까 다른 거 찾는 거고, 다른 거 하고 싶으니까 지금이 무서운 거지.”
말이 된다. 근데 답은 아니다.
“전환하면 연봉 깎여.”
“얼마나?”
“500? 1000?”
“감당 가능하잖아.”
“응. 근데…”
“근데?”
“기획도 나중엔 AI한테 밀리면?”
아내가 한숨 쉰다. “그럼 그때 또 찾으면 되지.”
쉽게 말한다. 근데 틀린 말은 아니다.
새벽 1시, 노션
‘PM 전환 계획’ 페이지를 연다. 3개월째 업데이트 중이다.
3개월 차 목표:
- 사내 프로젝트 기획서 1개 작성
- PM 인터뷰 3명
- 프로덕트 관련 책 5권
2개 했다. 인터뷰를 못 했다.
무섭다. 거절당할까 봐.
새 페이지 만든다. 제목: ‘왜 기획인가’
타이핑한다.
“AI가 코드를 짜는 시대. 나는 뭘 하고 싶은가?”
지운다.
“개발이 재미없어졌다. 그게 AI 때문인가, 원래 그랬나?”
지운다.
“기획이 좋아서인가, 개발이 싫어서인가?”
답이 안 나온다. 노션 닫는다.
유튜브 킨다. “개발자 커리어 고민” 검색.
영상 10개 본다. 다 다르게 말한다.
어떤 사람: “개발 끝까지 파세요.”
어떤 사람: “빨리 전환하세요.”
2시가 넘었다. 자야 하는데.
한 영상 더 본다. 제목: “도피와 성장의 차이”
“도피는 뒤를 보고, 성장은 앞을 본다.”
진부하다. 근데 멈춘다.
나는 뭘 보고 있지?
다음 날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생각한다. 어제 그 질문.
나는 ‘AI한테 밀리기 싫어서’ 도망치나?
아니면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걸 찾아서’ 가나?
둘 다인 것 같다.
회사 도착한다. 엘리베이터 탄다.
동료가 말한다. “어제 GPT한테 시킨 코드, 버그 10개 나왔어. 결국 내가 다 고쳤지 뭐.”
웃는다. “그래도 밑작업은 해주잖아.”
“그게 고마운 건지 슬픈 건지.”
동감한다.
자리에 앉는다. 슬랙 확인한다.
지혜가 보낸 메시지: “어제 말씀하신 데이터, 보니까 인사이트 나왔어요. 회의 때 공유할게요. 감사합니다!”
기분 좋다. 그리고 확신한다.
나 이거 좋아하는구나.
점심, 결심
식당에서 밥 먹는다. 지혜가 옆에 앉는다.
“한기획 님, PM 관심 있으세요?”
심장이 뛴다. “어떻게 알았어요?”
“요즘 질문하시는 거 보면… 개발자 질문이 아니라 기획자 질문이에요.”
“아…”
“우리 팀 PM 하나 더 뽑는다는데, 지원해 보세요.”
“개발 경력만 있는데 될까요?”
“개발 아는 PM이 제일 좋은데요?”
말이 된다. 근데 무섭다.
“생각해 볼게요.”
“빨리 해요. 다음 주 지원 마감이래요.”
사무실 돌아온다. 생각한다.
이게 기회인가, 함정인가.
오후, GPT와 대화
ChatGPT 킨다. 질문 친다.
“개발자에서 PM 전환, 어떻게 생각해?”
답이 온다. 장점 3개, 단점 3개, 조언.
다 아는 얘기다.
다시 친다.
“내가 도망치는 건지 성장하는 건지 어떻게 알아?”
답: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새로운 역할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지, 현재 역할에서 무엇이 불만인지…”
뻔하다. 근데 맞다.
탭 닫는다.
오후 4시, 동료와 커피
개발팀 선배 민수 형이랑 커피 간다. 경력 10년차.
“형, 요즘 개발 어때요? AI 나오고.”
“글쎄. 편하긴 한데, 실력은 안 늘어.”
“그쵸? 저도 그게…”
“너 PM 생각하지?”
”…어떻게 아세요?”
“회의 때 보면 알지. 눈빛이 달라.”
부끄럽다.
“이상해요? 6년 했는데…”
“아니. 나도 생각했어. 근데 안 했어.”
“왜요?”
“무서워서. 새로 시작하는 게.”
“후회해요?”
“글쎄. 근데 너는 해봐. 아직 젊잖아.”
32살이 젊나? 근데 10년차한테는 젊다.
“도망치는 것 같아서…”
“도망이면 어때.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말이 된다.
사무실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형도 불안하구나.
오후 6시, 지원서
사내 공고를 다시 본다. “프로덕트 매니저 (PM) 경력직/신입”
요구 사항:
- 사용자 중심 사고
-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 개발 프로세스 이해 우대
마지막 거. 나한테 유리하다.
지원서 쓴다. “왜 PM이 되고 싶나요?”
1시간 쓴다. 지운다. 다시 쓴다.
“개발을 하면서 ‘왜’를 묻게 되었습니다. 이 기능이 왜 필요한지, 사용자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코드는 ‘어떻게’를 다루지만, 저는 ‘왜’를 다루고 싶습니다.”
진부하다. 근데 진심이다.
제출 버튼 앞에서 멈춘다.
10분 고민한다.
누른다.
밤, 집
아내한테 말한다. “지원했어. 사내 PM.”
“오! 잘했다.”
“떨어지면?”
“그럼 또 지원하면 되지.”
“계속 개발자면?”
“그것도 괜찮잖아.”
“근데 AI가…”
아내가 끊는다. “야. 5년 뒤 걱정은 5년 뒤에 해.”
맞다.
일주일 후, 면접
1차 면접 통과했다. 2차는 실무진.
면접관 셋. 기획팀장, PM 두 명.
“개발에서 기획으로 가려는 이유가 뭔가요?”
준비한 답: “사용자 관점에서…”
실제 답: “솔직히 말하면, AI가 나오면서 개발이 불안해졌습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개발하면서 제일 재밌었던 게 ‘왜 이 기능이 필요한가’ 고민하는 거였어요. 그게 기획이더라고요.”
정적.
망했나?
팀장이 웃는다. “솔직하네요. 좋습니다.”
“기획도 AI한테 대체될 텐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르겠습니다. 근데 개발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AI는 데이터 분석은 잘해도, 사람 마음은 아직 모르니까요.”
“아직은요?”
“네. 아직은.”
또 웃는다.
“합격하면 연봉 협상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획 신입이면…”
“깎이는 거 알아요. 근데 1~2년 배우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습니다.”
“장기적으론?”
“3년 안에 지금 연봉 회복하고 싶습니다.”
“자신 있어요?”
“개발 6년 했는데, 배우는 건 자신 있습니다.”
면접 끝.
복도 나오면서 다리 떨린다.
이틀 후, 결과
슬랙 온다.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심장 터질 것 같다.
연봉: 5200만원. 1000만원 내려간다.
고민한다. 10분.
수락한다.
아내한테 전화한다. “붙었어.”
“진짜? 축하해!”
“근데 천만 원 깎여.”
“괜찮아. 네가 하고 싶은 거잖아.”
“응.”
끊고 나서 생각한다.
나 진짜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도망친 건가.
아직도 모르겠다.
한 달 후, PM 첫 출근
개발팀 자리 정리한다. 6년 쓴 책상.
동료들이 온다. “축하해.” “연락하자.” “잘하겠지.”
민수 형이 마지막으로 온다. “잘하고.”
“형도요.”
“나는 뭐… 그냥 여기 있을 거 같다.”
“형도 할 수 있는데.”
“됐어. 나는 이게 편해.”
악수한다.
기획팀 자리로 간다. 지혜 옆자리.
“환영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노트북 켠다. 슬랙 채널이 바뀌었다. #dev에서 #product로.
첫 업무: “신규 기능 사용자 리서치”
코드는 한 줄도 없다. 데이터와 인터뷰만 있다.
낯설다. 그리고 떨린다.
점심시간. 지혜가 묻는다. “어때요? 후회 안 해요?”
“모르겠어요. 아직.”
“언제 알 것 같아요?”
“한 1년?”
“그때까지 버텨요.”
웃는다. “네.”
3개월 후, 첫 기획
내가 기획한 기능이 배포됐다. “사용자 맞춤 알림”
개발은 내 전 팀이 했다. 코드 리뷰 요청 온다.
보고 싶다. 근데 참는다. 내 일이 아니다.
배포 후 지표 본다. 클릭률 12%. 목표는 10%.
성공이다.
근데 기분이 이상하다. 뿌듯한데, 허전하다.
직접 짠 게 아니라서? 아니면 원래 기획이 이런 건가?
지혜한테 묻는다. “기획하면 항상 이래요? 뭔가 한 거 같은데 안 한 거 같은 느낌?”
“맞아요. 개발자는 결과물이 코드잖아요. 우리는 결과물이 ‘변화’거든요. 눈에 안 보여요.”
“적응돼요?”
“시간 걸려요. 근데 어느 순간 보여요. 사용자가 행복해하는 게.”
그날 밤. 앱 리뷰 본다.
“알림 기능 좋아요! 딱 필요한 것만 와요.”
별 다섯 개.
기분 좋다. 처음으로 확신한다.
나 제대로 온 거 같다.
6개월 후, 회고
노션 킨다. 6개월 전에 쓴 글.
“기획이 좋아서인가, 개발이 싫어서인가?”
답 쓴다.
“둘 다였다. 그리고 둘 다 괜찮다.”
연봉은 5200만원. 1000만원 낮다.
근데 행복은? 측정 못 한다.
확실한 건:
- 아침에 일어나기 편해졌다
- 회의가 지루하지 않다
- GPT 쓰는데 죄책감 없다 (기획서 초안 시킬 뿐)
불확실한 건:
- 5년 뒤 PM도 AI한테 밀리나?
- 개발 안 하니까 실력 줄어드나?
- 이게 맞는 선택이었나?
근데 알았다. 정답은 없다.
도피든 진화든, 움직인 게 중요하다.
멈춰 있었으면 더 불안했을 거다.
1년 후, 민수 형 연락
민수 형한테 연락 온다. “밥 먹자.”
만난다. 형이 먼저 말한다.
“나도 이직했어.”
“어디요?”
“PM으로.”
“진짜요?”
“너 보니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
웃는다. “잘하셨어요.”
“너 덕분이야. 용기 났어.”
“아니에요.”
“진짜야. 너 움직이는 거 보고, 나도 멈춰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어.”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다.
형이 묻는다. “후회 안 해?”
“가끔요. 근데 안 했으면 더 후회했을 것 같아요.”
“나도 그럴 것 같아.”
헤어지면서 생각한다.
내 선택이 누군가한테 용기가 됐구나.
지금, 이 글
새벽 2시. 노션에 쓴다.
“기획 전환은 도피인가 진화인가”
1년 고민한 질문.
답은:
둘 다다. 그리고 둘 다 아니다.
도피 같을 때도 있다. 개발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 같을 때.
진화 같을 때도 있다. 내가 더 잘하는 걸 찾았을 때.
근데 중요한 건:
움직였다는 것.
멈춰서 ‘이게 맞나?’ 고민하는 것보다,
일단 가보고 ‘아니면 돌아오지 뭐’ 하는 게 나았다.
AI 시대에 정답은 없다.
개발자도 불안하고, PM도 불안하고, 다 불안하다.
그럼 뭐 하지?
내가 덜 불안한 쪽으로 가는 거다.
나한테는 그게 기획이었다.
너한테는? 모른다. 네가 찾아야 한다.
도피든 진화든, 움직이면 답이 보인다. 아직 안 보여도 괜찮다.
